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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지금-여기에서

―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작성일: 2023.10.19

PICK1 요약

1. 김연수의 스무 편의 짧은 소설 모음집

2. 낭독하기 좋은, 에세이 같은 소설들

3.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

푸르른 날에

책을 덮고 창문을 연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이다. 일 년에 이런 날을 며칠이나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1983년 5월에 나온 앨범 ‘송창식 83’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피아노의 첫 음이 터지고 송창식의 높은 목소리가 따른다. 뒷면 첫 곡 〈푸르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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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초록은 지쳐 단풍들고, 하늘은 하염없이 높고 푸른, 가을날이다. 이렇게 높고 푸르른 날을, 이렇게 맑고 환한 날을 나는 몇 번이나 보고 가슴에 담았던가. 있을 때 잘했어야 했는데.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한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나고 난 뒤에야 후회가 밀려온다. 흘러가고 난 후에야 회한에 젖는다. 인생도 그럴까. 다시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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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그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여름 환한 빛 아래, 어떤 사람은 곧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정든 동네를 떠나고, 어떤 사람은 창밖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녀를 동정한다면. 그 푸른 나무들 사이로 수업을 마친 아이가 돌아온다면. 마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그 아이를 맞이할 수 있다면.
 

-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123면

‘했어야 했는데’, ‘했다면’, ‘한다면’……. 누군가 그랬다. 천국에 간 사람은 무엇을 했어야 했는데 못한 것을 후회하고, 지옥에 간 사람은 무엇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 것을 후회한다고.

이 환한 가을날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다. 「두 번째 밤」을 시작으로 표제작까지 스무 편을 모아놓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이다. 표제작을 빼면 대부분이 열 페이지 안팎의 짤막한 소설들이다. 어떤 이는 짧아서 더운 여름날 가볍게 읽기 좋겠다고 한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밀도 높은 문장에 담긴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려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를 살아내면서 많은 사람은 얼굴을 맞대는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작가도 그랬던 것 같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의 배경음처럼 깔려 있다. 지금-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하고, 나를 사랑하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배웅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사랑의 단상들이 맞물려 빚어진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246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는 불행한가? 불운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261면)라고 자문자답하는 일본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265면)고 설파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소설가 ‘나’의 상념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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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라는 동사는 매 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와 대면한 사람의 역동적 순응을 뜻한다. 자기 앞의, 어쩌면 우연으로 가득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임,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서 타자와 함께 매 순간 새롭게 시작하기.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 287면

이런 사랑은, “매 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와 대면한 사람의 역동적 순응”을 뜻하는 사랑은, 결국, 지금-여기의 나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사랑이 있어 새롭게 살아갈 힘을 얻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랑은 지금 내 마음과 몸으로 하는 일이지, 과거나 미래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지금의 몸과 마음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게으를 수도 있는,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254-255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으로 배웅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뿐만 아니라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 「보일러」 「풍화에 대하여」 「위험한 재회」 「관계성의 물」 「강에 뛰어든 물고기처럼」 등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만큼 사랑한 사람은 사랑의 폐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들었던 「풍화에 대하여」에서, 학생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 어느 건축학 교수는 폐허만 남은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을 낡은 집에 비유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풍화를 거쳐서만 그 영혼이 드러난다고,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간 폐허에서 영혼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따라서 폐허는 끝이 아니라 가장 어린 영혼, 새로운 시작(145-146면)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랑은 세월과 더불어 낡아 폐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었다면 그 폐허에서 새로운 사랑이 싹을 틔울 수도 있다는 말이리라.



이유 없는 다정함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와 「거기 까만 부분에」는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소설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아들을 생각하면서 ‘가정(假定)의 지옥’에 갇혀 지내던 어머니의 ‘용감한’ 애도에 동참하여 함께 걷기도 하고, 세월호 참사로 친구를 잃은 청년이 천문대에서 찍은 밤하늘을 보면서 어둠에 묻힌 얼굴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보려고 하면 보인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거기 까만 부분에」, 238면) 것이다.

죽음의 시간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면, 개인이든 사회든, 죽음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 채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두 번째 밤」에서는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세상”(12면)을 구원할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한 지혜’를 제시한다. “악을 악으로 막을 수는 없으니 악을 물리치려면 선으로 맞서야만 한다”는 지혜, “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은 전쟁을 막는 일”이라는 지혜. 인류는 과연 이 평범하고 흔한 지혜를 모을 수 있을까.

사랑과 애도와 기억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사랑 없이, 애도 없이, 기억 없이, 인간의 삶이 온전할 수 있을까. 김연수는 이 물음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며, 그의 많은 소설들은 이 물음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는 창조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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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의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113-114면

이유 없이 다정하라!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이 소설가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기야 다정함 없이 사랑이, 애도가, 기억이, 기억을 차고 오르는 꿈이 어떻게 가능할까. 「관계성의 물」에서 보듯 한 순간의 다정한 손길이 난기류의 공포로부터 소녀를 구원하지 않았던가. 다정한 눈길이, 다정한 배려가 어떤 사람의 삶을 바꿔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도쿄대 부속병원에서 이상(李箱)이 죽고 난 뒤 화장된 곳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섀도잉」도 흥미롭고, 강아지 ‘궁금이’ 함께 산책하는 이야기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 없어서」도 재밌다.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들”(「작가의 말」, 297면)인 까닭에 눈으로 읽기보다 리듬을 타면서 소리를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작가여서 그런지 여러 작품에 많은 곡이 언급되는데(특히 「여름의 마지막 숨결」), 그 곡들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 것도 작품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길일 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날,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앨범 ‘송창식 83’의 앞면을 턴테이블에 걸고 첫 번째 트랙에 바늘을 놓는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의 가사가 귓바퀴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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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하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 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독서 Guide

1. 짧은 소설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자.

2. 낭독을 위한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의 차이는 무엇일까.

3. 사랑이나 다정함이 관계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지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자.

책정보

너무나 많은 여름이

저자김연수

출판사레제

발행일2023.06.26

ISBN9791196722012

KDC813.7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