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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거목이 자신을 마감하는 방법

-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작성일: 2023.10.05

PICK1 요약

1.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의 마지막을 생생히 전하는 노작.

2. 지성과 창조의 화신으로서 보인 녹슬지 않는 지혜.

3. 인간으로서 끝내 한 인간으로서 감추지 못한 솔직한 고백.

이어령에 얽힌 기억

현암사에서 나온 《고전의 바다》는 같은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주1회 연재된 대담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1976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단군신화부터 민속극까지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장르의 대표작을 망라하여,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정병욱과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 이어령 두 분이 한 작품씩을 두고 이야기한다. 중3에서 고1, 이제 막 지적 호기심이 피어날 나이의 나에게 잊지 못할 기사였다.

이 가운데 처용에 대한 이어령의 해석은 압권이다. 처용을 둘러싼 이야기 전체에서 처용을 바라보기—이어령 주장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바야흐로 왕조의 말기, 헌강왕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산천의 신에게 지혜를 구하는 과정에 벌어진 네 가지 사건이 전체다. 처용 이야기는 동쪽으로 갔을 때 일어난 사건, 전체를 보고 처용을 해석해야 비로소 본뜻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땅히 옳은 말씀이다.

거기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령의 이름을 각인시킨 이후 만나는 그의 족적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그 정점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 놓이지 않나 싶다. 1982년이었다. 상자 속에 상자가 들었고 그 안에 더 작은 상자를 넣는 ‘이레코’ 상자와 같은 예, 이런 예의 틀 여섯 가지로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분석하였다. 놀라기는 일본인이 더 놀랐다는 전설적인 책이다.



잘난 척은 하지만 착한 척은 하지 않는

언제까지나 아성(牙城)의 주인일 줄 알았던 이어령이 다른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것은 2021년 가을이었다. 벌써 87세의 원로, 그러나 치명적인 암 투병 중이며, 치료를 거부하고 ‘암과 싸우지 않고 같이 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세상에 남길 마지막 인터뷰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부언(附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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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이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와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1장

평생 세상을 향한 자신감 넘치는 필설(筆舌)의 바탕이 아마도 이런 태도였으리라. 잘난 척은 하지만 착한 척은 하지 않는 당당함이 그의 매력이었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2장)라고 힘주어 말한다. 여기서 꿀벌은 틀림없이 이어령 자신일 것이다.



이어령 식의 착각

영리한 사람의 뇌 한쪽도 부실한 경우는 있다. 이제 그는 가고 없고, 마지막 인터뷰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으로 나온 지금, 나는 고개를 갸웃할 아주 작은 한 장면과 마주한다. 같이 살려 한다지만 암 투병 중 때로 찾아오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라는 고백이 역설적으로 처절하다. 그런데 고통의 극이 착각을 불렀을까, ‘쓴다’는 말끝에 욥의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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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다 못한 욥이 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냈지. 그때 한 말이 뭔 줄 아나? ‘이 고통을 반석 위에 쓸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억울한 것을 바위 위에 새길 수 있다면…… 그게 욥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3장

기독교 구약성서에서 욥은 갑자기 재산과 자식을 잃고, 자신은 가려운 몸을 돌로 긁는 피부병에 걸린다. 실은 하느님의 시험이었다. 친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는 악담을 퍼부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쓸 수 있다면’ 하고 탄식했다는 것인데, 욥기 19장 24절은,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주었으면!”이라고 되어 있다.

누가 기록자이냐 문제다. 이어령은 욥이 자신의 극한 고통을 스스로 기록하길 바랐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쓰기에 좌단(左袒)하는 이어령이기에 쓰기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되는데, 나아가 이어령은 죽음에 대해 쓰는 장중한 작가의 운명을 자긍(自矜)으로 승화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성서에서 욥은 다만 고통의 기록을 누군가에게 의뢰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곧 처지에 대한 공감의 호소였다. 이것이 이어령의 착각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다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는다. 적어도 이어령 같은 이에게, 세기에 한두 분 있을까 말까, 위대한 삶을 기리고 그가 끼친 영향을 기리는 데서 나와야 한다. 과찬인가? 죽음을 앞두고 인터뷰로 끝까지 자신의 지적 온축을 풀어헤치는 이 책을 보며, 시대를 풍미한 문필가가 이어령 말고 당분간 또 누가 있을까 싶다. 그런 점만으로도 이 책의 희귀성은 오래도록 빛나리라. 심지어 자신의 단점을 서슴없이 내보이는 고백조차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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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사람들, 동료들, 제자들은 나를 다 어려워했어. 이화여대 강의실에서 강의하면 5~6백 명 좌석이 꽉꽉 차도, 스승의날 카네이션은 다른 교수에게 주더구만. 나한테는 안 가져와. 허허.
 

-6장

설마 꽃이 없었을 리 없다. 아마도 요란하게 치장된 형식이 아니라 정 넘치는 들국화 한 송이가 소중했다는 말씀이리라. 그래서 자신은 동료나 제자에게 ‘친밀감은 못 주었던 모양’이라고 적확히 진단한다. 진단 끝에 “그래서 외로웠네.”라는 말을 붙인 것이 마음 가득 짠하게 들려올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어령의 진정 인간다운 면모로 다가온다.

거장은 갔다. 봄을 앞 둔 2022년 2월 26일이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 이 책의 출간을 보았으니, 한 계절 마지막 책과 함께 숨 쉬다 영면에 든 것이다. 저자 김지수는 마지막 페이지에,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이라 적어 마지막 말로 삼았다. 거목의 장엄한 마감법이다.

독서 Guide

1. 이어령의 저서를 한 권쯤 다시 읽고 이 책의 육성과 대비해 보자.

2. 예로 든 분석에서 경중에 따라 비판할 소지는 없는지 찾아보자.

3. 그가 지향한 미래의 세계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토론해 보자.

책정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저자김지수

출판사열림원

발행일2021.10.18

ISBN9791170400523

KDC199.1

서평자정보

고운기 ㅣ 시인·한양대 교수

고운기 시인 한양대 교수 이미지

‘삼국유사’와 관련된 고전문학의 다양한 면면을 연구하면서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 30여 권의 저서와, 시집으로 『구름의 이동속도』 등 1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