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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없애고 지평을 넓혀야 한다

- 한강, 《채식주의자》

작성일: 2023.09.07

히든북 요약

1. 한강은 소설로 글로벌한 문학 시장에 가장 가까이 간 작가이다.

2. 《채식주의자》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하는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3. 아끼는 작가로서 한강이 문학적 지평을 넓혀 가는 데 일조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가장 가까이 간 작가

다소 이른 판단이지만, 우리가 굳이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면, 내게 떠오르는 가장 가까운 후보가 한강이다. 소망과 가능성 모두 그렇다.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거둔 그동안의 문학 내외적 성과가 판단의 배경이다. 주지하는 바, 노벨상은 먼저 영어로 번역되어 저쪽 세계에 잘 알려져야 하는 것이 전제이다. 그간 번역된 많은 한국 작가와 작품 가운데 《채식주의자》만큼 탄력적인 경우가 또 나오기 어렵다.

한강을 주목하는 본질적 이유는 그가 지닌 작가적 위치와 작품의 성격이다. 박완서로 마감한 우리 근대 문단의 여성작가 계보는 ‘여자의 일생’을 여성적 입담으로 풀어낸 것이었다면, 은희경, 공지영 같은 ‘센 여자’ 이야기가 새로운 계보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에 나온 한강은 ‘여자라는 인간’을 이야기 한다. ‘여자’에서 여성 작가의 계보를 잇지만, ‘인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이것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이다. 한강의 문학적 주제는 여자가 아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아주 처절하게 찾아가는 여정이다. 《채식주의자》의 주제가 그것이다. 이렇듯 처절한 경험이 《무정》 이후 지난 100년간 한국문학의 가장 약한 구석, 빈 데를 채워준다. 이 작품 주제는 음식문화로서 채식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꿈에 나타난 얼굴, 강박 속의 신경증, 주인공 영혜가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142면)라고 고백한 데서 이는 잘 드러난다. ‘얼굴’이라 특정한, 인간을 찾아가는 몸부림이다.



아주 특이한 구성이 주는 서사의 새로운 방법

세 편의 중편소설을 묶은 연작소설이 《채식주의자》이다. 첫 번째 중편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를 관찰하는 남편의 시점이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10면)인 아주 평범한 남자인 남편이 영혜와 결혼 한 것도 그런 여자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11면)만 빼면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복선이다. 어느 날 꿈을 꾸고,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을 느끼고, 거기 나타난 사람이 ‘분명 내 얼굴’이고 ‘내 얼굴이 아닌’(19면) 데서 영혜의 일상으로부터 이탈한 삶이 시작된다. 남편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두 번째 중편 〈몽고반점〉은 ‘미대를 나와 작가라고 행세하긴 하지만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44면) 형부가 영혜를 관찰하는 시점이다. 평범한 남자였던 남편에 비한다면 형부는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한 영혜를 이해하는 편이다. 아니 성적인 것을 포함한 호기심마저 가지고 있다. ‘목덜미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붉고 푸른 꽃과 줄기, 무성한 잎사귀가 그려져’(70면) 있는 무용 공연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어떤 미적 실마리를 얻은 형부는 영혜의 채식으로 만들어진 육신이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해 주리라 믿는다. 게다가 아내로부터 “영혜는 뭐, 스무 살까지도 남아있었는걸.”(73면)이라고, 몽고반점의 정보까지 얻은 다음에는 강렬히 집착한다.

영혜와 형부는 위험한 실험을 한다. 성공적이었다. 형부에게는 예술적으로, 영혜에게는 심리적으로 그랬다. 영혜는 몸의 그림이 “안 지워지면 좋겠어요.” (109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118면)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형부는 영혜를 인간으로 이끈 위대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파국이 오고, 파국의 수습은 뜻밖에 영혜의 언니가 지게 된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200면) 착하기만 한 언니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중편 〈나무 불꽃〉은 이 언니가 영혜를 관찰하는 시점이다.

무엇보다 세 편의 중편으로 이룩된 연작소설의 이 특이한 구성 방법에 먼저 눈길을 돌려야겠다. 세 편은 얼핏 스핀오프의 방법을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핀오프가 아니다. 한 주인공을 세 명의 관찰자가 각각 그려, 이를 합한 총체적 시점처럼 보이는데, 다만 여기에도 전통적인 그 기법을 벗어나 있다. 세 사람의 시점이 한 주인공을 바라보되, 같은 사건 같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순서대로 다른 사건이, 그 사건을 말할 가장 적정한 관찰자가 나온다. ‘시간이 움직이는 다른 시각의 관찰자 시점’이라는 좀 복잡한 정의를 내려야겠다.



한강의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데 함께 하여야

돌이켜보면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30대 중반에 쓰인 작품이다. 그의 문학적 전 생애를 알 수 없으므로 단언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작가의 가장 힘 있는 시기의 힘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의 한강은 인간의 실존적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감행하였다. 무심한 남편, 이기적인 형부를 지나 정 깊은 언니에 와서 주인공 영혜는 비로소 인간으로서 드러난다. 소설 끝 무렵에 언니가 하는 독백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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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 이상 사람이 아니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218면

비디오 아트 작업 끝에 결국 성교까지 간 형부와 영혜를 현장에서 목격한 이는 언니이다. 모든 것이 파국으로 이어지고, 언니는 정신병자로 남은 동생을 거두어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언니는 남편과 동생이 성교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치가 떨린다. 그러나 언니의 결론은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이다.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을 갈망하는 몸부림이라 인정하는 것이다.

한강의 초기 작품인 《여수의 사랑》이 여성적 감성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채식주의자》에 와서 한강은 여성을 벗어난다. 재언하거니와, 30대 중반의 가장 힘 있는 시절의 이 작품이 그녀의 문학적 생애의 전체에서 어떤 비중을, 어떤 의미를 차지하게 될 지는 기다려야 봐야 알 것 같다. 다만, 끊임없이 우리 독자가 이 소설의 지평을 넓히는 데 함께 하여야 한다. 40대 중반에 《소년이 온다》라는, 보다 사회적이고 세계 전체가 조망되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데 믿음이 간다. 한강은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다.

독서 Guide

1. 《채식주의자》가 3부작으로 이뤄진 작품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읽어보자.

2. 이 소설에서 채식주의는 주제가 아니다. 주제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3. 작가 한강에 대한 애정으로 그의 지평이 넓혀지는 데 독자로서 참여하자.

책정보

채식주의자

저자한강

출판사창비

발행일2022.03.28

ISBN9788936434595

KDC813.62

저자정보

고운기 ㅣ 시인·한양대 교수

고운기 시인 한양대 교수 이미지

‘삼국유사’와 관련된 고전문학의 다양한 면면을 연구하면서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 30여 권의 저서와, 시집으로 『구름의 이동속도』 등 1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