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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AI 앞에 선 인간

인간으로 살기 위해 진보보다 더 중요한 것이란

-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작성일: 2023.08.10

포커스 요약

1. 극한 기술의 시대,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켄 리우의 소설들

2. 중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선보이는 ‘중국SF’의 독특한 재미와 의미

3. ‘땀내 나는’ 인간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것

인공지능의 대두와 인간의 본질

자본과 경쟁이라는 양액을 빨아들이며 인공지능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23년 3월 중순의 어느 일주일은 ‘인공지능의 십 년’이라고 불린다. 십 년 안에 일어날 일이 일주일 사이에 일어났단 뜻이란다. 챗GPT가 등장하며 인공지능에 대한 심리적 장벽 또한 크게 낮아졌다. 인공지능이 우리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드는 날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며 상상력은 무한으로 뻗어나간다. 이대로라면 인공지능과 사람의 경계가 지어질 수 있을까? 근미래엔 내 곁의 인간이 사실 피부 껍질만 뒤집어쓴 인공지능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구분해낼 수 있을까?(사실 지금도 장담할 수는 없다!) 인간들의 뇌가 거대한 인터넷 데이터망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면? 실제로 이미 원숭이나 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은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고 있다. 더는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인간으로 남기 위한 길일지도

무섭게 발전하는 인공지능이 지금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도 물론 초미의 관심사지만, 종국에 질문은 ‘인간’을 향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컴퓨터와 인간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지금 인간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아니, 남아야 하는가.

2012년 단편 ‘종이 동물원’으로 SF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 석권한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가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서 파고드는 주제다. 서문은,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천착한 중요한 주제 하나는 격렬한 변화 앞에서 인간으로 남고자 부단히 애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시작된다.

열두 편의 중단편을 통해 작가는 이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고도의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소재가 다양하다. 네 번째 이야기, ‘사랑의 알고리즘’을 보자. 주인공 ‘나’는 어린아이 모습의 인공지능 인형을 디자인하는 기술자다. 자신의 아이를 91일 만에 잃은 슬픔이 기술이라는 돌파구를 만나 그녀는 마침내 살아있는 인간 아이와 구분 불가능할 정도의 인형, ‘타라’를 개발해낸다. 같은 일을 하는 남편까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감쪽같은 존재를. 그러나 ‘신이 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되려 인간만의 고유성에 대한 의심이자 회의였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하며 남기는 말은 극히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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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하다. 이 아픔은 진짜다.
 

- 165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리얼’한 현실,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무엇. 그것이 ‘죽음’이 아니냐고 작가는 질문한다. 그 전제는 ‘온전한 죽음’이다. 단편 ‘뒤에 남은 사람들’의 ‘엄마’는 ‘전자 기록으로 변하는 건 절대 사양’이라며 자기가 죽은 뒤에도 절대 *마인드업로딩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싱귤래리티 세계에서 고유한 신체와 감각, 경험을 유지하며 살고, 또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고대인’의 모습이다.

오랜 시간 인간은 고통과 노화, 죽음 등을 부정(不定)한 것으로 여기고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다. 질병-고통-노화-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비전이야말로 인간 역사를 발전시킨 동력 중 하나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한 기술의 시대, 비로소 우리를 인간으로 남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이러한 것들이 아니겠냐는 작가의 질문을 대리하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마음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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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지켜야 할 가치가 뭔지 하나도 몰라. 인간으로 살기 위해선 진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 212면

모국인 중국에서 켄 리우가 찾아낸 것

‘더 중요한 것’은 열두 편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루어진다. 영원한 젊음보다는 삶의 유한성을 알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어떤 용기(‘호’)로, 유전자 조작 볍씨로 더 많은 생산량을 담보하는 미국보다 산속에서 자신들만의 볍씨와 문화를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갔던 중국 내 어느 소수민족의 삶(‘매듭묶기’) 등으로….

그 과정에서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8세에 이민 온 중국계 미국인인 켄 리우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여전히 중요한 부분으로 갖고 있다(그는 중국어를 비롯한 중국 문화와 관습,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SF적 상상력을 덧입힌 ‘중국 SF’를 세계에 소개한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과 작가의 이민자 정체성이 연결되는 부분은 책의 곳곳에 엿보이는데, 이 연결고리를 더듬어보는 것은 켄 리우 소설의 묘미다.

가령 ‘심신오행’이란 소설이 그렇다. ‘타이라’는 불의의 사고로 우주선 동료 265명을 잃고 홀로 어떤 행성에 불시착한다. 늘 데리고 다니는 인공지능 ‘아티’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이 행성의 주민들은 1000년 전 종말을 맞이한 지구를 탈출해온 ‘고대 인류’다. 소설 속 시점으로는 문화적으로 ‘퇴보’했다고 여겨지는 이곳 주민들은 음양오행과 프로바이오틱 식이요법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타이라’는 극도로 발전한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이지만, 자연의 고리에서 뚝 떨어져나와 무균 상태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게 아닌, 장내 미생물을 비롯한 모든 존재와 조화롭게 공생할 때 비로소 좀 더 인간다운 인간일 수 있다는 실천적 깨달음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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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잘 보존해서 나머지 인류에게도 가르쳐 줘야 해요. 유서 깊은 공생 생물들과 더불어 사는 법, 또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한테요.
 

- 103면

싱귤래러티는 인간을 이루는 두 기둥-육체와 정신-을 대하는 치열한 대립각의 관점에 기반해 도래할 것이다. 몸, 그리고 몸으로 상징되는 것들은 벗어던져야 하는 굴레로 여겨지며, 정신이야말로 인간의 핵심이라는 믿음은 ‘기술’이라는 열차를 지치지 않고 달리게 하는 연료가 된다.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중국인으로서 켄 리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다운 삶’은 그 반대편 어딘가에 있다.



땀내 나는 인간의 이야기로 말하고 싶은 것

마지막 순서로 실린 중편 ‘모든 맛을 한 그릇에’는 특히 흥미롭다. ‘군신 관우의 아메리카 정착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짧지 않은 이야기는 분량상 책의 거의 1/3을 차지한다. 이 역사 판타지물에는 어떤 과학기술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총 맞은 상처를 그 옛날 화타가 관우를 치료했던 것처럼 약에 적신 붕대와 침으로 치료하는 중국인들의 행위는 기술 발전을 추앙하는 현대인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국내에 켄 리우라는 작가를 소개했으며, 켄 리우의 모든 저작을 번역해 ‘켄 리우 전문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무방할 장성주 번역가는 왜 이 이야기를 제일 뒤로 배치해 엮었을까.

무(武)와 충(忠), 의리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관우는 중국 민중들에게 두루 사랑과 존경을 받은 이다. ‘모든 맛을 한 그릇에’에는 관우의 일대기, 그리고 그 관우가 19세기에 환생했음 직한 ‘라오관’이란 인물의 아메리카 정착기가 평행하게 배치된다(이 중편은 1800년대 후반 실제로 미국 아이다호로 돈을 벌러 와 광부‧요리사‧세탁부‧정원사 등으로 정착했던 중국인들의 존재를 기반으로 쓰였다).

관우와 라오관은 둘 다 비참한 운명에 내몰렸지만 스스로 이를 돌파할 의지와 용기를 가졌고, 불의의 권력엔 저항하며 힘없는 이웃에겐 다정했다. 관우는 비록 적이지만 조조와 술잔을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라오관은 미국인 소녀 릴리와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눈다. 엮은이는 이 땀내 나고 구수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열두 편의 이야기를 하나로 꿰어내는 ‘더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뒤에 남은 사람들’에서 마인드 업로딩을 거부한 엄마가 이야기한 ‘진짜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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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짜 엄마는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토록 엉망진창인 세상에서도 살아가고자 애쓰는 진솔함이었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망이었고, 우리 육체가 겪는 고통과 수난이었다.
 

- 219면

덧. 이제껏 책으로 엮인 적 없는 중단편 열두 편을 묶었기에 이 단편집 앞에는 ‘오리지널’이란 단어가 붙었다. 《종이 동물원》 (2018)을 읽고 켄 리우 소설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 같은 독자는 1급 셰프의 ‘오마카세’를 눈앞에 둔 것처럼 설레지 않을 수 없었고, 켄 리우의 소설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급변하는 기술의 시대를 바라볼 ‘확대경’이 하나 필요하다면, 그리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면면을 선명하게’ 바라보는 독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켄 리우의 소설부터 시작하길, 강력히 권한다.

*마인드업로딩(Mind Uploading):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사이언스 픽션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와 같은 인공물에 전송하는 것

**싱귤래러티(Singularity): 양적으로 팽창하다가 질적인 도약을 하는 특정 시점. 주로 AI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시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독서 Guide

1. 컴퓨터와 인간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는 지금, 인간은 순수한 인간으로만 남아야 할까요?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이야기해봅시다.

2. 열두 편의 중단편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한 편을 골라 그 안에 담긴 ‘더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책정보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저자켄 리우

출판사황금가지

발행일2020.07.03

ISBN9791158887162

KDC843.6

서평자정보

김소담 ㅣ 헬프엑스 여행작가

김소담 ㅣ 헬프엑스 여행작가 이미지

헬프엑스(HelpX)는 호스트를 찾아 일손을 돕고(Help) 숙식을 제공받으며(Exchange) 전 세계를 여행하는 교환 여행 방식이다. 헬프엑스로 유럽과 남미를 여행하고 『모모야 어디 가?』, 『당신이 모르는 여행』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