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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파국에 이르는가

- 이언 매큐언, 《견딜 수 없는 사랑》

작성일: 2023.07.20

PICK1 요약

1. 현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장편소설

2. 우연한 사건과 우연한 만남, 그리고 비극적 결말

3. 사랑을 매개로 한 종교와 과학의 소통 (불)가능성 진단

사랑을 어찌할까

사랑만큼 위대하면서도 위험한 감정의 흐름이 있을까. 사랑은 메마르고 황폐한 마음을 푸른 대지로 바꾸기도 하고, 풍요롭고 평온한 일상을 한순간에 초토화해 버리기도 한다. 사랑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숭고하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하며,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비루하고 잔혹한 생각과 행위를 가능케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랑은 천국행과 지옥행의 갈림길에 걸려 있는 방향표시등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언어는 기대와 불안, 축복과 저주, 동경과 증오로 뒤섞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을 통해 낯선 타자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대면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온갖 부정적 감정이 싹트고 자라는 온상이기도 하다. 의심과 질투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은 또 얼마나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신과 인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든,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든,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든,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든, 인간과 동물의 사랑이든,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예고 없이 찾아오는 까닭에 피하기도 어렵다. 사랑의 습격에 대비해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일은 흔히 허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돌발적인 사랑의 습격에 순순히 자신을 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사랑을 어찌할 것인가.



심리적 스릴러물 혹은 사랑의 습격

《암스테르담》, 《속죄》, 《체실비치에서》 등으로 잘 알려진 현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이언 매큐언, 1997년에 간행된 그의 소설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의 습격 앞에 무너져 내리는 인간관계의 양상을 치밀한 문체로 그려낸 ‘심리스릴러물’이다. 사랑의 문제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심리소설이며, ‘사랑에 빠진(?)’ 젊은 남자의 치밀하고 끈질긴 스토킹과 이를 자기중심적으로 조작하는 주인공의 심상치 않은 과잉반응이 비극적 파국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스릴러물이다.

과학계 진입에 실패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과학 관련 글을 쓰는 조와 존 키츠를 연구하는 문학자 클래리사. 숲에서 피크닉을 즐기던 그들이 와인 병을 따려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조되는 중저음의 목소리’(19면)가 들려온다. 헬륨기구가 ‘돌풍’에 휩쓸리고 조를 비롯해 근처에 있던 남자 다섯 명이 밧줄을 붙든다. 거센 돌풍에 기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서 하나 둘 밧줄을 놓아버리고, 마지막까지 밧줄을 붙들고 있던 존 로건이 추락해 사망한다. 로건이 추락한 현장에서 젊은 남자 제드 패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밧줄을 놓은 것이 사망과 일정 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소설은 ‘누가 먼저 밧줄을 놓았는가?’라는 문제, 그러니까 “첫 번째 사람이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계속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은 누구일까?”(87면)라는 문제를 파고들 법한데, 독자의 기대를 보기 좋게 따돌리고 엉뚱하게도 제드 패리가 조를 사랑한다며 끈질기게 괴롭히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와인 병을 따려는 순간, ‘돌풍’이 불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소리’가 들렸으며, 밧줄을 놓는다. 1~2초 사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사랑의 파괴적 성격

그리고 젊은 남자가 추락한 현장에서 ‘잠깐’ 눈을 마주친 젊은 남자가 조를 ‘사랑한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제드 패리는 ‘뭔가가 우리 사이를 쓱 지나갔다’면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그건 그냥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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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통해 당신을 하느님께로 데려가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친 듯이 저항하겠죠? 하지만 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아요. 당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요. 그래서 당신이 받은 교육과 이성과 논리와 무심한 화법을 내세워 그렇게 치열하게 저항하는 거잖아요. 마치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것처럼?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척할 수는 있겠죠.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고 나를 지배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사실 난 당신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온 거예요. 목적은 당신 안에 있는, 그리고 당신과 한몸인 그리스도께로 당신을 이끌기 위해서요. 그게 바로 사랑의 선물이에요. 아주 간단하죠?”
 

- 103면

집 앞에서 기다리기, 전화하기, 편지 쓰기……. 제드 패리의 스토킹은 그칠 줄 모른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 ‘사랑을 통해 당신을 하느님 앞으로 이끄는 것이 내 목적’(149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는 무시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저항해 보지만 상황은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여기까지만 보면 패리가 문제를 제공하고 조는 이끌려가는 것 같지만, 클래리사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패리에게 집착하는 조가 의심스럽다. 혹시 밧줄을 놓았다는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것은 아닐까. 과학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종교를 끌어와 자기변명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혹시 제드 패리는 조가 자신을 위해 “부정직하게 현실을 조작한”(163면) 것은 아닐까. 클래리사는 고통과 불안을 호소하는 조에게 외친다. “당신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 정말 모르겠어?”(2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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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 하지 말아요”
 

‘나’와 타자의 관계를 확충, 심화하고 나아가 생성의 기쁨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사랑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전제로 하고 새로운(주로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목표로 삼지만, 때로는 일방적으로 환상을 실체화함으로써 사랑의 대상을 파괴하기도 한다.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사랑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를 넘어서 사랑의 파괴적 성격을 파헤친다. 이 소설의 ‘부록 1’에서는 드클레랑보 증후군에 관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증후군을 이해하는 것은 이 소설의 테마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라 할 수 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으로서 사랑의 반역

드클레랑보 증후군을 앓는 사람, 즉 다른 사람과 애정의 소통을 한다는 망상적 확신을 가진 환자는 자신의 대상이 먼저 사랑에 빠졌고 먼저 접근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제드 패리는 조가 자신을 먼저 사랑했고 그가 먼저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믿는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들이 그렇듯이 패리에게는 사랑이 “고립과 자폐를 동반한 삶의 방식이 되고, 그 안에서는 타인과의 일치 가능성이 사라진다.”(349면) 패리와 조 사이의 사랑은 처음부터 소통불가능한 파국이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조를 향한 패리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은 ‘레스토랑 총기 난사 사건’으로 비화한다. 패리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조는 ‘복수’를 준비하고,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패리의 죽음, 클래리사와의 이별……. 클래리사를 인질로 잡은 패리는 말한다. “사랑이 내 인생을 파괴했어요.”(316면)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병적인 열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밝은 세상을, 사랑이라는 명분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드는 정상적인 연인들의 세상을 반영하고 패러디하는 어둡고 비뚤어진 거울”이다.(193면) 그런 점에서 일차적으로는 이 증후군에 포획되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일방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패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일까.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문학연구자’이자 그의 연인인 클래리사가 조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이 소설은 사랑을 매개로 하여 ‘종교와 과학의 소통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일종의 메타포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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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는 내가 전혀 추측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미쳤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당신이 자기를 유혹하고 있다는 인상을 그가 어떻게 받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당신 마음속에서 뭔가를 끌어낸 거야. 첫날부터 당신은 그를 적으로 보았고 그를 쳐부술 생각만 했지. 그래서 당신이, 아니 우리가 큰 대가를 치렀어. 당신이 나와 더 많은 것을 공유했다면, 그는 그런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라.
당신이 화나서 집을 나간 날 밤, 내가 제안했던 거 기억나? 그를 초대해서 대화해보는 게 어떠냐고 한 거? 당신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 말았지만, 난 확신해, 그땐 패리도 몰랐을 거야, 언젠가는 당신이 죽기를 바라게 될 거라는 사실을. 우리 둘이 힘을 합했다면 패리가 선택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몰라.”
 

- 325-326면

문제는 소통이었던 셈이다. 과학적 이성의 소유자 조가 인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클래리사와 깊이 대화했다면, 그리고 패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여 애썼다면 파국에 이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패리는 이렇게 호소하지 않았던가. “난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는 말아요, 절대로, 절대로.”(208면) 그런데 조는 그의 호소를 외면하고 그를 유아론자로 치부했고, 결국 오해와 무지와 집착과 오만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러했듯이 이언 매큐언은 《견딜 수 없는 사랑》에서도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한 소설이면서도 과학적 이성과 종교적 감성의 소통 (불)가능성을 파고드는, 철학적 성찰이 빛나는 문제작이다.

독서 Guide

1. ‘사랑’은 생성하는 열정인가, 파괴하는 질병인가.

2. ‘사랑’은 어떤 경우에 폭력으로 바뀌는가.

3. 이 소설을 종교와 과학의 소통에 관한 메타포로 읽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책정보

견딜 수 없는 사랑

저자이언 매큐언

출판사복복서가

발행일2023.03.16

ISBN9791191114430

KDC843.6

저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