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북 요약
1. 자연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개체는 존재한 적이 없다.”
2. 생명의 시작, 곰팡이. “모든 생명의 근원은 바로 곰팡이이다.”
3. 모르는 것과 불확실함을 인정하는 과학적 자세. “생명은 실체가 아닌 과정이다.”
느슨한 확실성
멀린 셸드레이크는 말 그대로 ‘괴짜’ 과학자다. 그의 책을 펼치면 ‘LSD 실험’에 참여해 LSD를 주입했을 때의 경험이 실린
서문이 우릴 반기는데, LSD는 호밀 등 식물에서 사는 곰팡이에서 추출한 마약의 일종으로 비틀즈의 명곡 〈Lucy in the Sky with
Diamond〉가 LSD의 앞 글자를 딴 것이라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유명하고 강력한 환각제다. 그런 경험을 자기 책의 서문에 싣다니!
심지어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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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곰팡이(LSD)가 나의 확실성을 느슨하게
만들었듯이.
과학은 관측하고 검증할 수 있는 사실만을 다루기에, 무엇보다 확실함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확실성을 느슨하게 만들고 싶다니?
과학책 저자가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치고는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의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곰팡이를 알아야 한다.
나누기 어려운 나와 너의 경계
곰팡이는 생명 곳곳에 깃들어 있다. 식물의 뿌리와 흰개미의 집, 심지어 우리 몸속에도 곰팡이가 살고 있다. 이때 동물과 식물의
역할은 보통 곰팡이를 보호하고, 곰팡이가 스스로 얻기 어려운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곰팡이의 역할은 무엇일까? 먼저 식물의
뿌리와 내밀하게 얽혀 영양분을 주고받는 곰팡이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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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는 이 거친 땅의 능숙한 방랑자이며 식물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먹이를 찾아낸다. 곰팡이를 자기 뿌리에 살게 함으로써 식물은
그러한 영양원에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영양분을 빨아들인다. 파트너를 맞아들임으로써 식물은 인공장기 곰팡이를 얻고,
곰팡이는 인공장기 식물을 얻는다.
인간과 곰팡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까? 인체의 장 속에 있는 박테리아와 곰팡이 등을 총칭해 ‘장내 미생물’이라고 부르는데, 최근 그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장내 미생물이 인간의 건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물론, 우울증·치매·다발성경화증 등 다양한 질병과도
관련이 있다고 밝혀지고 있을 정도. 그렇다면 곰팡이를 몸속에 품고 사는 인간에게 곰팡이는 일종의 (몸속의) 외부 장기다. 곰팡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도 마찬가지, 인간은 몸속에 자신을 품어 보호하고 영양분을 찾아다 공급하기까지 하는 똑똑하고 거대한 외부 장기다. 이처럼
곰팡이와 인간이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필요로 한다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곰팡이는 인간이라는 개체 안의 존재인가,
개체 밖의 존재인가?’ ‘곰팡이와 인간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 ‘애초에 개체는 존재하는가?’
살아 있는 수수께끼, 지의류
지의류는 지구 표면적의 8퍼센트를 덮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분포하지만, 아직도 그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존재다.
지의류는 보통 광합성을 담당하는 조류 또는 박테리아와 영양분 획득과 물리적인 보호 기능을 담당하는 곰팡이 등의 공생체로 이해되는데,
그 공생의 방식이 굉장히 유연하고 가변적이며 다양하다. 저자는 지의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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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류 전체가 개체일까? 아니면 지의류를 이루는 구성요소, 또는 부분이 개체일까? 이런 질문 자체가 온당할까? 지의류는 각 부분의
합이라기보다는 그 부분 사이의 교환이다. 지의류는 안정적인 관계의 네트워크이며, 지의류화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명사이면서
동시에 동사다.
실시간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독주가 벌어지고, 이내 또 여러 음이 뒤섞이는 재즈를 떠올려 보자. 재즈는 음악의 한 갈래를 뜻하는
명사임과 동시에, 다양한 악기의 음색이 자유자재로 어우러지는 즉흥 연주 과정을 의미하는 동사이기도 하다. 지의류도 마찬가지다. 재즈를
감상할 때 부분보다는 전체에 집중하듯이, 지의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류와 곰팡이라는 일부분보다는 지의류라는 생태 전체를 조망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는 이렇듯 하나의 단위로 행동하는 여러 유기체의 집합을 통생명체(holobiont)라 부르기도 한다.
생명의 보고, 지의류
우리는 흔히 곰팡이를 죽은 동식물의 사체를 분해하는 분해자로만 바라보지만, 곰팡이는 생명의 끝은 물론 시작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존재다. 곰팡이와 조류의 연합체인 지의류는 강력한 산성 물질을 분비해 바위를 녹이고 미네랄 결합 물질을 분비해 바위를 소화하는데,
이렇게 지의류가 소화해 낸 미네랄은 동식물의 몸을 구성하는 필수 영양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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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물인 바위 속 미네랄 덩어리가 생명체의 대사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지의류 덕분이다. 우리 몸속에 있는 미네랄의 일부는
어느 시점엔가 지의류를 거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지의류가 풍화작용을 통해 딱딱한 바위를 부수고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식물은 육지에 뿌리조차
내릴 수 없다. 또, 현존하는 식물 대부분이 식물의 가장 가는 잔뿌리보다도 훨씬 가느다란 곰팡이의 균사가 식물의 뿌리와 얽혀 형성한
균근(곰팡이뿌리)을 통해 영양소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현존하는 모든 동물이 식물과 곰팡이(버섯)에 의존해 살아가니, 말하자면 곰팡이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셈이다.
생명의 스펙트럼
예로부터 인간은 언어능력, 지능, 영성, 자의식의 유무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가며 다른 모든 생명으로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별하려
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소나 돼지를 잡아먹는 데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인간은 다른 생명보다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하니까.
그런데 그러려면 한 가지 특별한 전제가 필요했다. 생명이 다른 생명과 구분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특히 개체로서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특별한 믿음 말이다. 그러니 인간 존재의 특별함을 믿고 싶은 사람에게, 곰팡이는 그러한 믿음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리는 악질적인 생명체나
다름없다. 곰팡이는 모든 생명을 연결하는 존재로서,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통생명체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은 사실만을 다루며 확실함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인간이 포착한 사실 그 자체가 불확실하다면?
불확실한 생명의 경계를 어떻게든 나누기 위해 의문스러운 분류학적 카테고리를 만들고, 그 불완전한 카테고리 안에 모든 생명을 욱여넣는 것이
온당할까? 생명의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오히려 확실하고 과학적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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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곰팡이는 우리가 기껏 구축한 분류 시스템을 벗어나기 일쑤다. (…) 2013년, 균학자 니컬러스 머니는 〈곰팡이 명명법에
반하여〉라는 논문에서 곰팡이의 종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포기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 분류체계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요즘은 자폐증 대신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는 빛의 스펙트럼이 불확실한 경계를 지녔듯이, 자폐 뇌와 비자폐 뇌 사이의 경계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포착해 만들어 낸 용어다. 어쩌면 생명 자체가 그런 것 아닐까? 생태계는 확실한 체계에 따라 분류되는 생명체가 아니라
불확실한 생명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물결이 아닐까?
본문에 담지 못한 이야기
넘쳐나는 쓰레기와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는 오늘날, 곰팡이와 버섯(곰팡이의 자실체)은 여러 환경친화적인 잠재력을
지녔습니다. 곰팡이로 쓰레기를 분해하는 것에서부터 버섯으로 건축물을 짓는 데까지, 이 책은 곰팡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소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으로 느타리버섯을 길러 먹고 술을 발효해 마시겠다는 저자의 황당한 계획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환경과 생태에
관심 있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독서 Guide
1. 생명을 개체로 바라보는 관점은 유용하지만, 전체 과정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생명을 실체가 아닌
과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어떤 면에서 유용할까요?
2. 저자는 ‘지능과 인지 작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취향의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능은 인간의 전유물일까요?
미로를 찾는 곰팡이에게 지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3. 곰팡이는 인간의 확장된 신체처럼 기능합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로 길을 찾는 시각장애인을 상상해 봅시다.
지팡이를 시각장애인의 확장된 신체, 즉 감각기관의 일부로 볼 수 있을까요?
책정보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저자멀린 셀드레이크
출판사아날로그(글담)
발행일2021.04.23
ISBN9791187147725
KDC484.4
서평자정보
이준기 ㅣ 글 쓰는 돌봄 노동자
어렸을 때부터 과학책을 좋아했지만, 학교 공부는 체질에 안 맞았다. 연세대학교(원주)
작업치료학과를 졸업하고 약 5년 동안 계약직 작업치료사로 근무하면서 객원 기자로 틈틈이 과학 글을 썼다. 출판사 기자를 거쳐,
현재는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며 과학·시사·장애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