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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문법을 뛰어넘는 이야기의 힘

- 천명관, 《고래》

작성일: 2023.06.15

PICK1 요약

1. 2023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작

2. 노파-금복-춘희의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

3. 설화와 동화와 무협지를 아우르는 상상력의 향연

21세기형 이야기꾼

천명관의 소설 《고래》가 잔잔해 보이던 ‘소설의 바다’ 위로 거센 물줄기를 내뿜으며 솟구쳐 오른 것은 2004년이었다. 골프용품 판매원, 보험 외판원, 시나리오 작가 등을 전전하던 천명관은 이 작품으로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고, 청년층과 중장년층을 아우르는 독자들은 그의 거칠 것 없는 입담에 환호했다. 문학동네소설상 심사위원이었던 임철우의 말마따나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기존의 상식을 보기 좋게 훌쩍 비켜서는, 놀랄 만한 다채로움과 독특한 개성을 지닌” 《고래》는 대단한 흡인력으로 21세기 한국 소설의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 모자란 시간이 지났다. 이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2023년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작에 오르면서 국제적으로도 천명관의 ‘구라’가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한국에서도 《고래》를 다시 찾는 손길이 늘었고,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무슨 고약한 심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서대중이 환호할 때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던 나도 부커상 관련 소식을 듣고서야 때늦게 《고래》를 찾았다. 채 열 쪽을 넘기기도 전에 헤어나기 힘든 ‘이야기의 덫(?)’에 빠졌다는 걸 알아챘다. 4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내달렸다. 해찰할 틈이 없었다.

《고래》를 포함해 천명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내, 16세기 프랑스 문학판에서 웃음으로 독자들의 허리를 꺾어놨던 프랑수아 라블레의 《가르강튀아》가, 18세기 영국 문학판에서 딴청과 너스레로 엄숙한 독자들의 진을 빼놓았던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가, 누구나 다 아는(안다고 생각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신비한 고래와 집념의 사나이 사이의 대결을 그린 허멀 멜빌의 《모비딕》이, 20세기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세계 독자들의 소설관을 바꿔 놓았던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갈마들었다. 그리고 처용설화와 판소리와 동화와 무협영화와 만화까지도. 활용 가능한 이야기 장르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면서 쉼 없이 ‘구라’를 풀어내는 그를 21세기형 이야기꾼이라 할 수 있을까.



고래의 죽음 또는 불타는 ‘고래극장’

《고래》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근대의 소설 이론이나 문법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춘희의 엄마, 금복의 세계라.”(41면)와 같은 예에서 보듯 고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전환 기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활용하는가 하면, 작가가 직접 얼굴을 들이밀고 “국밥집 노파가, 그녀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건 아니시겠지?”(151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성급한 독자여, 조금만 더 들어보시라.”(161면)라며 독자를 눈앞에 있는 청중 대하듯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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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 117면

《고래》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에서 전쟁을 거쳐 박정희 독재 시절과 산업화 시대까지이다. 핵심적인 공간적 배경은 가상의 장소인 ‘평대’와 ‘남발안’이다. 평대와 남발안은 산업사회로 들어선 한국의 축소판이다. 분노와 심술만이 가득한 복수의 신 국밥집 노파, 생명력과 욕망의 화신 금복이, 거대한 몸집에 벙어리이지만 순수하고 뛰어난 교감 능력을 지닌 춘희, 이 세 여성이 핵심인물이다. 아울러 생선장수, 걱정, 칼자국 등 금복의 남자들, 갈 곳 없는 금복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쌍둥이 자매, 뜨내기 일꾼 文, 금복의 고향친구이자 배신자인 약장수, 벌 떼를 자유자재로 몰고 다니는 국밥집 노파의 딸 애꾸, 외로운 춘희의 동무 코끼리 점보 등이 기이하고, 사악하고, 놀라운 ‘마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래》는 그 무엇보다 ‘고래’ 이야기이다. ‘고래’는 금복이 생선장수를 따라온 부두에서 본 고래이자, 거대한 몸집의 춘희이며, 춘희와 죽음 너머에서까지 교감하는 코끼리 점보이자, 금복의 꿈이었던 극장이다. 작가의 요구대로 내 방식대로 이해하자면, 거대하고, 기이하고, 신비하고, 비극적인 ‘고래들’의 이야기가 《고래》의 핵심이다. 금복의 눈에 비친(상상한?) 고래의 모습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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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 해수면 위에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 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 65면

금복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생명체의 감동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평대에 고래 형상의 극장을 세운다. 거대한 건축물로 재현된 고래와 고래의 꿈! 거대한 고래가 막 물에서 뛰쳐나온 듯 꼬리를 한껏 치겨든 극장의 모습. 군중들은 놀라워하며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그것은, 코끼리 점보가 그랬듯이, 박제된 것이었다. 고래를 박제한 극장은 불타버린다. 국밥집 노파의 저주로 극장이 불타 사라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전쟁 이후 압축적으로 근대를 경험한 한국 사회의 묵시록이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쳐 왔던 욕망의 화신 금복이도 불탄 극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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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 301면

소설은 유희다

그 후, 춘희가 1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돌아왔을 때 평대는 사라진 고대도시, 아니 개망초꽃만 무성한 원시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곳에서 신비한 ‘인간 고래’ 춘희는,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149면) 특별한 능력을 지닌 춘희는 수렵과 채집으로 살다가 아름다운 벽돌을 만들어 내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왜 그랬을까? “그 작업 안에 어떤 종교적 희원이 담겨 있었다면 그 바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그 열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406면) 물음과 이야기는 계속된다.

넓은 여백과 개망초꽃 무늬, 또 다른 여백과 짤막한 문장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13면) 이 아득한 여백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상상력? 해석과 의미들? 아니면 이야기들? 아마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또 하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서사 욕망은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데,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천명관은 《고래》에서 들려준다. 기존의 관습이나 형식이나 법칙에 얽매이지 말고, 거창한 의미를 전달하여 애쓰지 말고, 인류가 남긴 이야기의 바다에서 힘 빼고 헤엄을 치듯 하면 된다고 말이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천명관은 이야기만 한 유희가 드물다는 것을 잘 아는 작가이다. “처음 쓴 소설이었고 문학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누가 이 소설을 읽을 것이라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작가, “사실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못할 얘기도 없어서 아는 온갖 얘기를 다 끌어왔고 좋아하는 온갖 형식도 한 군데 다 모아서 썼더니 이런 형식이 됐다”(부커상 후보자 대담)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작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가 엄숙주의나 예술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소설 읽기를 놀이처럼 즐길 필요가 있다. 즐기다 보면 가끔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벼락처럼 뒤통수를 때릴 때도 있을 것이다. 《고래》가 그렇다. 그것도 자주 뒤통수를 때린다.

독서 Guide

1. ‘소설’과 ‘이야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2. 《고래》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3. 《고래》가 ‘재미있다’면 왜 그런지 이야기해 보자.

책정보

고래

저자천명관

출판사문학동네

발행일2004.12.18

ISBN9788982819278

KDC813.7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