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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종속,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 정세현, 《정세현의 통찰》

작성일: 2023.05.18

PICK1 요약

1. 남북 관계 전문가 정세현의 한국 외교에 관한 통찰

2. 한국 외교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넓고 깊은 시야

3. 현장 경험에 바탕을 둔 한국 외교의 자국 중심성에 대한 고언

산산이 부서진 꿈

2018년,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연결고리로 하여 남북 관계의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는 이런 꿈을 꾸었었다. 끊어졌던 철길이 열리면 서울역에서 표를 끊어 평양을 거쳐 정주까지 가야지. 그곳에 가서 김소월의 흔적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봐야겠어. 백석의 자취도 찾아보고 말이야.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하얼빈까지 가는 건 어떨까. 이효석이 머물렀던 호텔 카페에서 커피 향에 물들어도 봐야지. 북쪽으로는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갈 수도 있겠구나. 남쪽으로는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베트남 끝까지 갈 수도 있겠고……. 아니지, 아니야. 튼튼한 SUV 한 대 할부로 사서 유라시아 대륙을 떠도는 거야.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스탄불까지. 여섯 달쯤이면 될까. 한 일 년쯤?

나의 꿈은 한없이 부풀었고, 내 상상력의 영토는 끝없이 넓어지기만 했다. 당사국들이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 아래 경제교류가 활성화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만 있다면 굳이 통일이 아니어도 좋았다. 남북 연합이든 통일이든 우선은 가까이 지내고 볼 일이 아닌가. 판문점과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을 지켜보는 나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2019년 2월 27일과 28일에 열린 하노이 회담……. 밤을 꼬박 지새운 나는 ‘노딜(no deal)’ 소식에 주저앉고 말았다. 탄식은 깊었고 아쉬움은 길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미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군산복합체의 냉혹한 셈법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는데도 나는 트럼프라는 ‘사업가’의 한바탕 쇼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차로 또는 자동차로 떠나는 북한과 유라시아 대륙 여행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꿈이 사라진 후, 2년 넘게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 미국의 파워게임 전면화 등 국제정치에 어두운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한국 정부는 대미 관계와 대일 관계에 집중하면서 탈중국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러시아에 적대적인 태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외교적 발언 어디에서도 자국 중심성에 입각한 실용주의적 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미 관계에서는 한미동맹 강화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바이든의 요구대로 충실하게 따르고, 대일 관계에서는 관계 정상화를 외치면서 일본 극우세력의 요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자존심이고 역사 인식이고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보이질 않는다. 한미일과 북중러 사이의 대립과 긴장의 고조는 피할 수 없을 터, 심각하고 엄중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국제정치의 논리? 조폭 세계의 논리!

이러다 정말 신냉전 체제의 중심으로 한국이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말 대중국 및 대러시아 관계가 악화하여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파탄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말 긴 세월 힘겹게 쌓아 올린 대한민국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말……. 우울한 상념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우울한 상념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책 한 권을 펼친다. 40년 넘게 남북대화 운영부장, 대통령 통일비서관, 통일부 차관과 장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세현이 쓴 《정세현의 통찰》이다. 저자는 자국 중심성, 실용주의, 자주성을 핵심어로 하여, 멀리는 조선시대에서 식민지시기까지, 가까이는 이승만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외교가 걸어온 길을 살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지만, 경험 많고 지혜로운 노인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행간은 찬찬히 되새겨야 할 의미로 꽉 차 있고 여백은 깊이 헤아려야 할 통찰로 번뜩인다. 예컨대 저자가 바라보는 국제관계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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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국제관계가 돌아가는 원리는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조폭 세계와 다름없다. 상하의 관계, 강약의 관계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큰 나라는 작은 나라들한테 심부름도 시키고 무리한 요구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국제정치, 국제관계다.
 

- 27면

거창하게 국제관계론이니 국제청치론이니 하면 처음부터 주눅 들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명료한가. 국제관계의 원리는 조폭 세계의 원리와 다를 게 없다!

이 험하고 냉혹한 ‘조폭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한 국가의 외교정책의 목표는 안보, 번영, 권위다.”(112면) 다시 말해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력과 정보력을 갖춘 강대국들 사이에서 안전과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길이 외교의 핵심이다. 안보를 예로 들어보자. 한반도의 안보와 관련하여 한미동맹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미동맹을 안보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한미동맹 그 자체를 국방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거부하거나 포기한 사람과 다를 게 없다. 미국의 품을 벗어나면 위험하다는 둥, 자주적인 외교는 빨갱이들이 노리는 거라는 둥 온갖 구실을 동원하지만, 그런 언어의 이면에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유아의 심리,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다 커서도 독자적인 길을 찾지 못하고 엄마에게 의존하는 순진하고 어리바리한 ‘마마보이’, 그것이 우리 외교의 현실이다.



한국 외교의 길?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위상이 높아졌으면 그것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 투자든 시설 투자든 중국에서 돈을 더 벌 수 있으면 미국과 약간 불편한 관계가 되더라도 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서 무역 흑자를 더 내야 하지 않겠나. 미국이 투자를 요청할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의 몸집이 커졌는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미국 울타리 안에서 살던 시절에 가졌던 태도로 미국을 떠받들고 미국 뜻대로 순종하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힘이 있어도 여전히 매달리면 미국은 우리를 계속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길 것이다.”(266-267면) 왜 아니겠는가.

현 정부 들어서 한국의 외교는 대미 종속성과 대일 종속성의 깊고 어두운 터널로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자국 중심성, 실리,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최소한의 역사 인식은 물론 외교적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언(苦言)이 들리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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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을 가지고 평화 체제를 만들고 지키려면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방해를 뚫고 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남북이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쯤이나 미국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북한과 평화협정 체결해서 사이좋게 살 테니까 미국 너희는 인정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리고 당분간 미군은 그대로 있어도 좋아.’ 우리와 북한이 이렇게 합의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가 되고, 북한도 국제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국과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267-268면

‘저자의 말’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내게 국제정치와 남북관계에 대한 전문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으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8면) 지혜나 지식을 나눈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남북문제를 둘러싼 외교 현장에서 다진 자신의 경험을 소화하여 많은 사람에게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외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책을 두고 저자는 ‘공공재’라고 표현한다. 독자성과 자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자국 중심성과 실리마저 내팽개친 채 재롱부리듯 미국과 일본의 품으로 뛰어드는 퇴화한 어른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수상하고 암울하며 모멸감을 떨치기 힘든 시절, 우리는 이 ‘공공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독서 Guide

1.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이란 무엇인가.

2. 남북 관계와 국제관계의 관련성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3. 외교가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책정보

정세현의 통찰

저자정세현

출판사푸른숲

발행일2023.02.16

ISBN9791156754039

KDC349.11

저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