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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다시 찾아온 여행

마음의 발길을 따라 아일랜드를 걷다

- 리베카 솔닛, 《마음의 발걸음》

작성일: 2023.04.20

포커스 요약

1. 미국의 비평가 겸 역사가 리베카 솔닛의 아일랜드 여행기

2. 여행자의 눈이 포착한 아일랜드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

3. 여행, 장소,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인문적 에세이

시네이드 오코너의 〈대기근〉을 들으며

《마음의 발걸음》을 덮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어렵사리 싹을 틔운 검은 감나무 가지에 눈길이 머문다. 저항 음악의 아이콘 시네이드 오코너가 부르는 〈대기근(Famine)〉을 듣는다. 아니, 들려온다.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강렬한 비트. 오코너는 시를 낭송하듯 조용조용 아일랜드 대기근(1845~1861)의 비극을 들려준다. 아일랜드에 관해 얘기하려면 ‘대기근’을 빼놓을 수 없다. 전례 없는 감자 흉작, 굶주림, 죽음, 탈출……. 지옥의 풍경이 이러할까.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죽어가는 가운데 육류, 생선, 야채 등 다른 먹을거리가 무장경비 아래 영국으로 수송된다. “이 와중에/그들은 아이들에게 아일랜드어를 가르치지 말라고 돈을 주었지/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잃었어.”

아일랜드가 대기근으로 잃은 것은 백만 명이 넘는 목숨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로 탈출해야 했고, 낯선 곳을 떠돌면서 모욕과 차별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일랜드에 남은 사람들은 절망한 나머지 알코올중독, 약물중독, 살인 등에 노출된 채 자기 파괴의 길로 치달았다. 역사가들은 역사를 왜곡했고, 부모들은 진실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기억을 잃었고, 역사를 잃었다. 이것이 아일랜드 대기근의 비극이라고, 이것은 아일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 받고 상처 입은 ‘모든 외로운 사람들’의 문제라고, 애도와 기억 그리고 이해와 연대를 통해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시네이드 오코너는 노래한다. 그리고 리베카 솔닛은 《마음의 발걸음》에서 “트라우마는 침묵의 형태로 대물림된다. 침묵의 소리는 듣는 법을 알게 되기까지 몇 세대가 걸릴 수도 있다.”(134면)라고 말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일랜드와 함께 시네이드 오코너, U2, 크랜베리스 등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새뮤얼 베케트, 존 밴빌 등을,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대기근을 비롯해 내전, 종교 분쟁, IRA(아일랜드 무장단체) 등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일랜드 현대사의 비극을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 억압과 차별을 당해야 했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와 겹쳐 보면서 동병상련을 실감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대략 이런 ‘요소들’로 아일랜드의 이미지는 구성된다. 내가 상상하는 아일랜드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 아이리시 커피와 기네스 맥주를 더할 수도 있으리라.



메타포의 향연, 입체적 사유

나는 다시, 《걷기의 인문학》(2000)과 《이 폐허를 응시하라》(2009)의 저자 리베카 솔닛의 《마음의 발걸음》 (원제는 ‘A Book of Migrations’)을 가이드 삼아 아일랜드를 걷는 상상을 한다. 탄탄한 인문적 지성을 갖춘,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에세이스트의 면모가 이 책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고정된 이미지나 관념을 해체하고 다른 눈으로 다른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을 여행이라 한다면, 이 책은 그런 여행 과정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여행기이다. ‘그동안 전해져 내려온 유럽성, 백인성, 아일랜드성에 대한 정의들과 여행, 장소, 시간에 대한 정의들을 재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정의들을 복잡한 맥락 속에서 넣어 해체하기 위해’(10면) 떠난 아일랜드 여행을 통해 저자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될 리 없는 유럽적인 것, 백인적인 것, 아일랜드적인 것을 재사유하고 재배치한다.

열일곱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여행 에세이에서 저자=가이드는 우리를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안내하면서 그 장소와 시간이 품고 있는 풍부한 의미를 들려준다. 예컨대 ‘언어, 상징, 메타포, 상상력의 박물관, 한때 우리의 삶 속에서 서식했지만 이제 우리의 언어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는 피조물들의 박물관’인 더블린 자연사박물관의 진열장 앞에서 그는 메타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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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는 이 존재와 저 존재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가늠할 통로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아찔할 정도로 다양한 동시에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를 그려 보이기도 한다. 세상에서 메타포가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형체가 없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런 세상은 우리와 너무 똑같아서 지겨운 곳, 아니면 우리와 너무 달라서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 76면

메타포가 사라진 밋밋한 세계, 얼마나 지리멸렬할 것인가. 이 책이 다른 여행기들과 구별되는 것도 곳곳에서 펼쳐지는 풍성한 메타포의 향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사유는 장소에서 역사로, 사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진다. 제4장에서는 세인트 스티븐 공원―1916년 부활절 봉기―독립영웅 로저 케이스먼드―자연사박물관에서 본 나비 표본―로저 케이스먼트가 남아메리카에서 수집한 나비―로저 케이스먼트의 콩고 보고서―레오폴드 2세의 야만적인 콩고 지배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장소와 사람과 사물과 역사의 복합적 관련성을 드러내 보인다. 이와 같은 사유는 영국의 아일랜드 침탈의 역사와 미국의 원주민 및 멕시코 침탈의 역사를 한 자리에 놓고 통렬한 자기비판을 수행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간다. “아일랜드가 750년에 걸친 영국 점령기를 종식시키고 비로소 아일랜드인의 땅이 되었다면, 지금 캘리포니아는 누구의 땅일까?”(205면) 저자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의 서부는 원래 주인이었던 멕시코에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 사물과 인간을 종횡하는 입체적 사유가 이 책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다.



미완의 여행, 유동하는 아일랜드

여행(travel)은 관광(tourism)과 다르다. 관광이 고정된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행위라면, 여행은 시간과 장소를 경험하면서 대상과 나를 다시 발견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박제된 시간과 공간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리듬을 나의 마음/정신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인생을 여행이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몸의 위치뿐 아니라 기억의 위치, 상상의 위치를 바꿔놓는’ 것이며, ‘처음 가본 곳들, 몰랐던 곳들이 주로 망각 속에 묻혀 있는 묘한 연상들과 욕망을 끄집어내주는’(32면) 것이다. ‘아무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되어 새로 세우고 새로 배울 자유를 누리는’ 것, ‘특정 장소에만 존재하는 기억과 풍경 간의 조응관계에서 벗어나는’ 것(340-341면), 다시 말해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낯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여행이다.

《마음의 발걸음》은 낯선 시간들과 장소들을 잇는 길이다. 길을 가다 잠시 머무르는 곳에서 나는 아일랜드의 상처투성이인 역사와 풍경을 만난다. 그리고 역사와 풍경이 낳은 사람들의 이야기, 켈트 신화와 제임스 조이스와 비정주 원주민 트레블러들이 들려주는 아일랜드 이야기를 듣는다. “아일랜드는 하나의 유럽이 있다는 가정을 깨뜨리고, 백인 개념을 깨뜨리고, 대서양까지가 유럽이라는 통념을 깨뜨리는 곳이다. 문화의 깨진 지점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276-277면)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유대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인의 불안한 현재’(433면)를 살아야 하는 리베카 솔닛이 여행의 끝에 발견한 아일랜드는 이런 곳이다. 물론 고정되거나 완성된 아일랜드 이미지는 있을 수 없다. 미완인 채로 유동하는 아일랜드가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이 처음 간행된 1997년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녹색 사막’이라 불리던 농촌은 어떤 풍경일까. 정주를 거부하는 트레블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율리시스》의 인물들이 거닐던 더블린의 길은 어떤 모습일까. 소도시의 펍(pub)은 여전히 소란스러울까. 《마음의 발걸음》이 끝난 지점에서 나는 아일랜드를, 내가 사는 이 땅을, 나 자신을 얼마나 다르게 볼 수 있을까. 돌로레스 오리어던의 슬픈 목소리가 선연한, 크랜베리스의 노래 〈좀비〉가 귀청을 때린다. “1916년부터/네 머릿속에서, 네 머릿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어/탱크와 폭탄으로.”

독서 Guide

1. ‘여행’과 ‘관광’의 차이는 무엇일까.

2.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인상은 어떠한가.

3. 이 책을 읽은 후의 아일랜드는 어떻게 다른가.

책정보

마음의 발걸음

저자리베카 솔닛

출판사반비

발행일2020.10.12

ISBN9791190403276

KDC982.4802

저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