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요약
1. 1930년대 두‘여행하는 여성’이 물어오는 여행의 의미
2. 화가 나혜석과 작가 후미코의 여행기를 비교해 읽으며 얻는 즐거움과 의미
3.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멋진 언니’들의 응원
여행하는 여성, 혹은 여성의 여행
제목을 한참 붙들고 놓을 줄을 몰랐다.
이 단순한 단어의 조합에 봄날 새로 움이 돋아나는 나뭇가지처럼 몸과 마음 어딘가가 간질거린다. 여행 그리고 여성.
원래도 무한히 넓은 의미의 단어들이지만, 둘은 나란히 놓임으로써 더욱 묘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장 큰 소수자 그룹이자 ‘오래된 이방인’이 바로 여성이다. 여행은 어떤가? 임정연의 《여행‧젠더‧장소》에서는
여행의 함의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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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 이름, 가족, 관계, 언어, 민족, 국가 등 – 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주체가
자발적으로 ‘이방인’ ‘망명자’ ‘유목민’ 되기를 실천하는 행위
- 14면
그 자신 오래된 이방인인 여성이 주체적으로 길 떠나 ‘이방인-되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성은 여행에서
무엇을 만났고 여행 이후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여행은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가?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를
읽어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작은 책이 오랫동안 품어온 내 안의 질문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도울 ‘열쇠’라는 사실을.
두 근대 여성의 세계 여행기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1900년대 초를 대표하는 조선의 신여성, 화가 나혜석의 ‘구미여행기’다.
남편 김우영이 받은 포상 휴가의 동반자 자격으로 떠난 그녀의 여행 일정은 1927년 6월 부산 출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시작으로
1년 8개월 23일 동안 유럽과 미국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혜석이 돌아오고 2년 뒤, 《방랑기》로 유명한 일본 작가 하야시 후미코가 길을 떠난다. 역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파리에 입성한 스물여덟 살 후미코는 225일간 파리와 인근 시골 마을, 런던 등을 여행하고 돌아온다.
책의 후반부를 잇는 건 그녀가 쓴 ‘삼등여행기’다.
나혜석의 여행과 후미코의 여행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르다. 세 아이를 노모에게 맡기고 남편과 떠난 나혜석의 여행(모든 일정을
남편과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과 나 홀로 떠나 목숨까지 걱정해야 하는 후미코의 여행, 배와 철도 등 근대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호텔에
투숙하는 넉넉한 여행(나혜석이 지출한 여행 경비는 당시 일반 월급쟁이가 꼬박 30년을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다고 한다)과 싸구려
식료품으로 채운 바구니를 끌어안고 담요를 빌려 덮으며 맹추위를 견뎌야 하는 여행이 판판이 대비된다. 일등칸과 삼등칸의 풍경이 다르고,
파리를 위시한 구미라는 여행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화가와 작가의 그것이 다르다.
가령 문화의 상징인 파리에서 나혜석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피어나는데’ 비해, 언어의 장벽을 온몸으로 느끼며 도착 직후
일주일 내내 잠만 자는 후미코의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도 있다. 당대의 아이콘이자 셀레브리티였던
나혜석과, 가난하지만 기지 넘치는 여류작가 후미코의 눈에 담기는 구미의 풍경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두 여행기의 특성은 나란히
놓였기에 비로소 흥미롭게 도드라지며, 차이를 감상하는 것은 독서의 별미 중 하나다.
나란히 놓였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기획 면에서 몹시 흥미로운 이유는 병렬적으로 놓인 두 여행기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여행기를 나란히 엮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편집부는 이렇다 할 의도를 내비치지 않고 다만 ‘엮는 글’에서 아래처럼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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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모두 비슷한 삶을 살지 않는다. …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만들어 갔을까.
- 9면
‘만들어 가다’라는 표현처럼 두 여성의 여행은 주체성 그 자체다. 근대의 목전에서 발아한 ‘여성’이란 계급적 한계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삶에 대한 강렬한 변화 욕구, 열린 세상을 향한 능동적 의지’(《여행‧젠더‧장소》, 15면)로 생을 걸고 떠난 여행이다. 나혜석은 아내와
엄마, 딸이라는 역할을 벗어던지고, 후미코는 전쟁의 그늘 아래 홀로 죽음의 위험도 무릅쓰고 나선 여행길이 아니었던가.
더 ‘나’이고픈 모든 이들을 위해
두 여행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당시 여행과 여행기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은 교육 받을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던 시절,
선진 문물의 발원지로 여겨졌던 구미(歐美) 곧 유럽과 미국을 여성이 장기간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
여행기는 더욱 희귀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글쓴이는 조선의 페미니스트 선각자 나혜석, 그리고 타고난 방랑의 운명을 동력 삼아 삶을 살고 글을 써낸 여류작가
하야시 후미코다.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진취적으로 일생을 살아가고자 평생 분투했던 나혜석, 그리고 ‘본투비’ 프롤레타리아로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은 진한 동지애로 길 위의 세상을 껴안았던 후미코. 긴 여행을 통해 그녀들이 세계 속에서 자신들 삶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해 나가는 과정을 엿보며 독자 또한 자신의 ‘어떤 여행’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생을 걸고 여행하는 여성은, 송곳이다. 생동하고자 하는 욕구를 저해하는 내‧외부의 장막을 뚫고 나가는 송곳이다. 1930년대
두 여성의 여행기가 100여 년 뒤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것은 그녀들이 뚫고 나가고자 했던 것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930년대의 나혜석과 후미코, 그리고 책을 펼친 2023년의 ‘우리’가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이어진다. 더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모든 이가.
독서 Guide
1. 여행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생각을 나누어봅시다.
2. 각 여행기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이유를 함께 말해봅시다.
3. ‘여성이란 계급적 한계’가 여행에 있어 지금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 나누어봅시다.
책정보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저자나혜석, 하야시 후미코
출판사정은문고
발행일2023.02.21
ISBN9791185153544
KDC910.4
서평자정보
김소담 ㅣ 헬프엑스 여행작가
헬프엑스(HelpX)는 호스트를 찾아 일손을 돕고(Help) 숙식을 제공받으며(Exchange) 전
세계를 여행하는 교환 여행 방식이다. 헬프엑스로 유럽과 남미를 여행하고 『모모야 어디 가?』, 『당신이 모르는
여행』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