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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 다시 찾아온 여행

낯선 세계와의 만남, 그 원대한 파노라마

- 빈프리트 뢰쉬부르크, 《여행의 역사》

작성일: 2023.04.06

포커스 요약

1. 지리적 상상력을 확대해온 유럽 문화사

2.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좌충우돌

3. 관련 이미지 자료들을 따라 더듬어보는 여행의 발자취

길을 떠나는 이유

어린 시절 ‘여인숙’이라는 간판을 보면서 여자만 들어가는 숙소라고 생각했다. (여인숙과 여관은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가 아니면 각 방에 있는가로 구별된다) ‘여인(旅人)’은 여행객을 뜻하지만, 왠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원래 여행이란 일종의 방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그네’와 ‘방랑자’는 이제는 시(詩)나 노래(한국에서만 해도 ‘방랑자’라는 제목으로 박인희, 장필순, 성시경이 각각 다른 곡을 불렀다)에서만 등장하는 단어지만, 과거에는 여러 모양으로 실재했다. 우리는 《여행의 역사》라는 책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아득한 수렵 채집 시대부터 인류는 더 나은 서식지를 찾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농경 시대에 접어들어 정착한 이후에는 각종 물자와 도구를 교환하기 위해 장거리 이동을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상인은 낯선 지역을 개척하는 선구자였는데, 배[船]의 성능이 좋아지고 바퀴 수레가 등장하면서 무역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높아지는 기동성은 상업적 동기를 넘어서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도록 부추겼다. 영원한 삶을 찾아 수많은 지역을 유랑했던 길가메시 왕처럼 많은 사람이 기적을 찾아 길을 나섰다.

고향을 떠나는 동기는 다양했다. 그리스인은 올림픽 경기 참여하거나 신탁을 듣기 위해 순례했고, 로마의 귀족은 온천지를 찾아 목욕을 즐겼다. 낭독자와 속기사를 데리고 학술 여행을 떠난 학자나 역사가도 있었다. 로마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행자의 필요에 맞춰서 제작된 각종 여행 안내서들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지리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되고 있다. 여행자는 타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이나 구술로 전해주었는데, ‘콘텐츠’가 너무 부족했던 당시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인기를 끌기 위해 자기 경험을 부풀리거나 조작하여 들려주는 허풍쟁이도 적지 않았다.



험난했던 여행길

로마의 네로 황제는 여행할 때마다 1천 대의 의장 마차가 호위했고, 그의 부인은 매일 우유 목욕을 하기 위해 당나귀 5백 마리를 마차 뒤에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마차의 속도는 시속 7.5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지만, 중세까지 여행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험난한 고역(‘travel’의 어원은 ‘힘든 노동’을 뜻하는 불어의 ‘travail’이다)이었다. 숙소가 불편할 뿐 아니라 주인에게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산적이나 해적을 만나면 모든 소지품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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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즐거움과 거리가 멀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택지나 거친 물이 넘나드는 수로로 변했고, 엄청난 눈은 산길의 통행을 막았다. 길에 처박히거나 뒤집어진 마차를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하려고 각목과 땔나무단, 밧줄을 준비하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리와 목이 부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여행의 축복과 소원은 불행 앞에서 여행자들을 보호한다고 했다.
 

- 106면

근대에 접어들어 도로와 교통망이 정비되고 치안이 확보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길을 나서기 시작했고, 이제 여행은 사람에게 새로운 자의식을 갖게 하면서 그 자체로 교양의 독자적인 형식이 되었다. 화가는 이국적 풍경을 찾아 먼 곳을 찾았고, 괴테는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방문하며 낡은 관습의 틀을 벗고 진정한 예술가로서 내면을 성숙시켰다(그 과정이 《이탈리아 기행》 이라는 저서에 담겨있다). 또한 17세기에는 유럽의 귀족 자제들이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유럽을 돌아다니는 품격과 전통을 갖춘 동아리 여행’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연세대 사학과 설혜심 교수가 저술한 《그랜드 투어》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 결과는 여러 가지 사회 변화로 이어졌는데, 예를 들어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유럽 여행에서 받은 자극과 영감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외국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이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회화에서 광고 포스터까지

19세기에 접어들어 유럽 곳곳에 기차가 깔리고 대형 선박이 제조되면서 여행은 중요한 여가로 자리 잡았고, 만국박람회가 열리면서 진기한 스펙터클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대륙을 횡단했다. 다른 한편 유럽인은 지구의 마지막 미탐사지인 남미 대륙, 아시아 사막, 아프리카와 극지방을 탐험했는데, 그렇게 해서 열린 길을 따라 연구자, 선교사, 이주자, 군인, 식민지 관리인이 이주했다. 식민지 쟁탈의 참혹한 전쟁이 여행의 역사 이면에 깔려 있다.

이 책에는 여행의 역사에 관련된 시각 자료가 듬뿍 담겨 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여건에서 상상되던 낯선 세계, 탐험하는 사람의 옷차림과 정서가 생생하게 담긴 회화와 사진, 여행 경로와 역참 등을 알려주는 안내서, 여행 중에 발생하는 안전사고가 묘사된 그림, 여행자들이 이용한 교통수단의 모습, 관광산업 초창기에 발행된 광고물과 포스터…. 책장을 넘기다가 그런 이미지들에 저절로 시선이 머물게 되는데, 새로운 것을 향해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류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쉽게도 이 책은 유럽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어서, 아시아나 한국의 경험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비춰볼 수 있는 여지는 많다. 역사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은 생활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감각을 키우면서 선조들이 미지의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탐색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관광이 다시 활성화되고 그 양상도 점점 다양해지는 지금,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지리적 확장을 통해 어떻게 변용되어왔는지를 확인하면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독서 Guide

1. 역사 속에서 여행의 방식을 바꿔온 변수나 요소들은 무엇인가?

2.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곳을 탐험하는 충동이 왜 유럽에서 두드러졌을까?

3. 아시아와 한국을 중심으로 여행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사건과 인물이 등장할까?

책정보

여행의 역사

저자빈프리트 뢰쉬부르크

출판사효형출판

발행일2003.08.05

ISBN9788986361827

KDC910.9

서평자정보

김찬호 ㅣ 성공회대 겸임교수

김찬호 ㅣ 성공회대 겸임교수 이미지

사회현상과 마음의 움직임을 인문학적으로 풀이하면서 더 나은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여러 대중강좌를 통해 시민과 함께 배우는 사회학자. 『생애의 발견』, 『모멸감』, 『유머니즘』등 십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