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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날린 종이비행기,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작성일: 2023.03.16

히든북 요약

1. 1978년 초판 발행 후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현대의 고전’

2. 간결한 시적 문체로 현실과 환상을 교직한 언어예술의 걸작

3. 노동자=도시빈민의 삶을 통해 그린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

‘소희’, ‘난장이’의 후예?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나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퀴퀴한 냄새, 썰렁한 객석.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다. 눈시울을 훔치고 높은 천정을 바라본다. 아득하다. 잔혹하고 비열하고 기만적인 노동 환경에 서서히 죽어가던 소희는 맨발에 ‘삼선쓰레빠’를 신은 채 차가운 저수지 속으로 침몰한다. 누가, 무엇이, 왜 열여덟 살 소희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도, 학교도, 교육청도, 경찰도……. 부모마저도 소희가 왜 죽어야 했는지 잘 모른다. 형사 오유진의 뜨거운 눈물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정주리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다음 소희》 얘기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난장이’의 죽음과 ‘난장이의 후예’ 소희의 죽음. 두 죽음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고 또 얼마나 가까운가. 다시, 《난쏘공》을 펼친다. ‘난장이 가족’의 삼남매 중 첫째인 영수의 공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영수는 또 묻는다.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110면)

중력을 박차고 뛰어오르고 싶어 했던 소희, 춤추는 소희를 쓰러뜨린 것은 우리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그 연원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폭력이다.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 그 논리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한 ‘나-우리’의 무관심과 무감각, 그것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뭐라 할까. 그런데도 자신이 또 다른 소희, ‘다음 소희’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에 이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이리라. ‘소희들=난장이들’의 죽음은 끊이질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없는 욕망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활개 치는, 남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죽은 땅’(102면)의 풍경이 선명하다.



‘난장이 마을’의 꿈

1978년 처음 독자들을 만난 이후 4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난쏘공》을 읽어왔고 또 읽고 있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몇 백만은 넘지 않을까 싶다. 최인훈의 《광장》과 함께 ‘국민적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난쏘공》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사건’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장애인, 노동자, 도시빈민 등 소수자의 고통스러운 삶과 꿈을 그린 《난쏘공》이 여전히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전히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를 밀도 높은 언어로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말, 작가 조세희의 죽음과 함께 독서계에는 다시금 잔잔하지만 깊은 《난쏘공》 바람이 불고 있다. 이 현상은, 작가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난장이 가족’의 삶을 통해 ‘지금-여기-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독자들의 심리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2023년의 독자들은 《난쏘공》에서 무엇을 읽어내고 있을까. 간결한 문체의 미학?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구성? 7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노동 현실? 사랑의 세계를 향한 상상?

《난쏘공》은 길고 짧은 열두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인물관계도를 개략적으로 그려보면, 다섯 명의 ‘난장이 가족’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신애, 지섭, 윤호 등 ‘난장이’와 연대하고 협력하는 인물들이, 다른 한쪽에는 은강기업 회장, 경훈, 부동산 브로커 등 ‘난장이’를 약탈하고 억압하는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난장이 가족’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과 그들이 꾸는 아름다운 꿈 사이의 대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생존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열악하고도 폭력적인 노동 현실. 그들의 꿈은 무엇일까. 영희는 큰오빠에게 ‘난장이 마을’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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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읍처럼 안전한 곳은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항상 생활 용품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난장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어떤 종류의 억압・공포・불공평・폭력도 없다. 권력을 추종자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무서운 법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 릴리푸트읍에는 전제자가 없다. 큰 기업도 없고, 공장도 없고, 경영자도 없다. …… 독자적인 마을을 열망한 작은 힘들이 난장이 마을을 세웠다. 영희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곳 난장이들은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자녀들의 출산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거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너무 불행했었다.
 

- 195~196면

억압과 공포와 폭력이 가득한 세계를 벗어나 사랑이 넘치는 세계를 가꾸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꿈이자 영수의 꿈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영수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혔다가 죽어 나온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세상,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하는 세상(233면)은 정녕 헛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릴리푸트읍이든, ‘사랑의 세상’이든, ‘낙원의 꿈’을 잃은 자는, 도스토옙스키 말마따나, 살 자격이 없는 것은 물론 죽을 자격도 없다! 아버지가 꿈꾸는 ‘달나라’, 영희와 영수가 꿈꾸는 ‘난장이 마을’은 참담한 현실을 헤치고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동력이다.



종이비행기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글을 많이 쓰지 않은 작가로 유명한 조세희는 《난쏘공》을 간행한 다음해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 (동서문화사, 1979)이라는, 단편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포함한 소설들과 산문들을 모은 책 한 권을 펴낸다. 《난쏘공》의 ‘각주’라 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표제작은 영호와 영희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영희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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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행복동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 병사가 아버지였다는 생각 오빠는 안 들어? 아버지는 작고 투명한 유리병정이었어. 누구나 아버지 속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 약한 아버지는 무엇 하나 숨길 수 없었어. 하루하루의 싸움에서 유리병정은 후퇴만 했어. 어느 날, 더 이상 후퇴해 디딜 땅이 없다는 걸 작고 투명한 유리병정은 알았어. 유리병정은 쓰러지고 깨어져 피를 흘렸어. 그렇게 작고 그렇게 투명한 몸 어디에 그것이 있었을까.”
 

- 97면

‘유리병정’은 피뢰침을 잡고 발을 앞으로 내민 자세로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그리고 공장 굴뚝 위에서 떨어져 목숨을 거둔다. ‘난장이’가 날린 종이비행기에 그려진 꿈은 무엇이었을까. 차별과 억압, 대립과 갈등이 사라진 세계, 그러니까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지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입체’(29면)의 세계였을까, 아니면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인’ ‘클라인씨의 병’(262면)의 세계였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를 요구하며 전태일이 몸을 불태웠고, 많은 ‘유리병정’들이 목숨을 빼앗겨왔다. 아버지 ‘난장이’가 그랬듯이. ‘난장이’의 아들 영수가 그랬듯이. 《다음 소희》의 소희가 그랬듯이. 그러니 물을 수밖에. ‘난장이’가 날린 종이비행기는, 지금은, 어디쯤 날아가고 있을까.

어렵사리 52시간으로 줄인 최저 노동 시간을 64시간으로, 아니 69시간으로 늘린다는 소식이 별 저항 없이 오르내린다. 노동조합을 악마화하는 언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떠돈다. 은강재벌 최고경영자의 말, ‘노조는 우리 전체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악마의 도구’(295면)라는 말이 50년 가까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하기야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니까 노동자로서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드문, 우리 사회의 해괴한 현상에 비춰보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가 거대한 자기기만과 자기부정의 늪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이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난쏘공》을 읽고 이러한 자기기만과 자기부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난장이의 꿈’을 두고 저세상으로 떠난 작가 조세희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독서 Guide

1. 《난쏘공》이 지속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 《난쏘공》이 예술성과 현실성을 두루 갖추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3. 《난쏘공》에서 ‘지금-여기-나-우리’의 모습을 꿰뚫고 있는 문장을 찾아보자.

책정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저자조세희

출판사이성과힘

발행일2000.07.10

ISBN9788995151204

KDC811.36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