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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통치 : 수학이 다스리는 세상은 공정할까?

- 알랭 쉬피오, 《숫자에 의한 협치》

작성일: 2023.03.09

히든북 요약

1. 신학, 철학, 경제학 등을 아우르는, 향후 법학 분야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책

2. 법경제학을 비판하고, 약속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 강조

3. 법치(法治)를 대신하고 있는 수치(數治)의 탈피

#1 서평에 앞선 에피소드

사람마다 새로운 책을 접하는 길은 다양하다. 필자의 경우 신문 북 섹션의 서평에 의지하는 편이다. 논문이나 책을 쓸 때 곁에 두고 지속적으로 참고해야 할 책은 구입하곤 하는데, 서평만 읽고 덜컥 샀다가 책장만 차지하여 후회할 때가 더러 있다. 이런 경험 탓에, 서평으로 끌리면 일단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다가, 소장해야겠다 싶으면 읽기를 중단하고 주문한다. 그런데 간혹 ‘중단’할 시기를 놓쳐버릴 때가 있다.(물론 지금 말하는 장르는 전문 서적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대개 듬성듬성 읽다가 필요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서도, 저자가 나를 위해 쓴 것이 아닐까,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어떻게 알았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이렇게 위로 받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멈추기’ 어려운 경우다. 두 번 읽는 중복투자를 피하려면 중단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계속 읽어 내려갈 때는 반납을 대비해 지우기 쉽게 연필로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에 메모를 적는다. 그런데 독서에 몰입하다 보면 이미 내 책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주문한 책이 도착해 도서관 책에 메모한 것을 옮겨야 하는데, 그 작업량이 방대해 차라리 새 책을 도서관에 반납할 수는 없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도서관에 알아보니 당연히 안 된다는 답이 왔다. 아예 분실했다고 하면? 곁의 사람의 그런 조언에 필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분실했다고 말했다. 직원은 분실처리를 한 후 내가 가져간 새 책을 받았다. 알랭 쉬피오의 《숫자에 의한 협치》가 바로 그런 책이다.



#2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강연물

1530년에 설립된 콜레주 드 프랑스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가 거쳐 갔는데, 현재 54개 석좌교수만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 고등교육의 최고 기관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의 강연이 책으로 나와 고전이 되곤 하는데, 그간 미셀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롤랑 바르트 등이 강연 후 책으로 냈다. 일련의 시리즈 속에 이 책은 법학분야 석좌교수인 알랭 쉬피오가 2012~2014년에 걸쳐 강연한 것이다.

강연의 제목은 “État social et mondialisation : analyse juridique des solidarités(사회국가와 세계화: 연대에 대한 법학적 분석)”이었다. 번역자 박제성(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쉬피오가 낭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그에게서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원저 출간 불과 4년 만에 한국어로 소개됐는데, 신학, 철학, 경제학 등을 넘나드는 이 책은 향후 법학 분야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고 조심스레 예상한다.



#3 법의 정의 대신 수학과 경제학적 방법론이 대체하는 세상

저자는 근대의 산물인 ‘법의 지배(rule of law)’가 국가 주권과 관련이 있는데, 국가가 쇠퇴함에 따라 법의 지배도 쇠퇴한다고 진단한 후 국가는 도구적 역할로 전락하고, 이런 맥락에서 법도 이해타산의 대상으로, 즉 전 세계적 규범 시장에서 경쟁에 처해 있는 입법 상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26면) 이 과정에서 ‘법에 의한 지배’는 비인격적 권력에 대한 추구의 흐름을 보이는데, 결국은 ‘숫자에 의한 협치(La Gouvernance par les nombres)’로 귀결되고 말며, 그 끝은 인격적 예속관계 또는 봉건적 주종관계의 재등장이라고 한다.(27-28면)

이런 흐름의 시작을 저자는 법경제학(law and economics)의 대두에서 찾는다. 저자는 법경제학이 1940년대 말부터 시카고대학교 로스쿨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190-191면) 스위스 기업가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47년에 설립한 몽펠르랭(Mont-Pèlerin) 협회의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의 과학성에 대한 믿음을 여론과 학계에 정착시키기 위해 196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창설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191면) 법경제학의 법이론이 수행하는 교리적 기능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교리적 기능과 구조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데 두 경우 모두 법을 숨겨진 과학 법칙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는다고 한다.(192면) 이들은 경제학이 자연과학과 똑같은 과학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192면)

경제학은 더 이상 부의 생산과 분배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오늘날 경제학은 방법론으로 정의된다.(194면) 계산에 의한 조화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의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숫자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인간 사회를 통치할 수 있는 완벽한 과학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를 꿈꾸는 플라톤주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여기에서 순결무구한 모습으로 재등장한다.(195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코스(Ronald H. Coase)는 1960년 〈사회적 비용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법에 관한 새로운 경제학적 분석 방법을 열었다.(201면) 코스의 이론은 법경제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포스너(Richard A. Posner)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판사의 임무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에 대하여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가장 생산적인 방식에 맞게 할당하는 것으로서, 정의를 경제적 효율성과 동일시한다.(203면) 코스의 정리가 묘사하는 법의 세계는 정언명령이 없는 세계이며, 각자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권리로 무장한 계약 입자들이 사는 세계이다. 판사도 더 이상 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사례별로 개별적 효용의 총합을 극대화하도록 요구받는 일종의 회계사에 불과하게 된다.(205면)

법학에 들어온 경제학, 즉 법경제학을 비판하는 데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는 저자는 약속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코스와 포스너 식의 경제학적 방법론이 법학에 들어오게 되면, 비용-편익 계산을 통해 ‘효율적 계약파기 이론’이라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207면).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로마법의 격언은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첫 시간부터 뇌리에 박히는 금언인데, 효율적 계약파기 이론에 따르면 계약을 이행하는 것보다 계약 위반에 대한 배상금을 무는 것이 더 유리할 경우 계약파기도 허용돼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207면) “판돈이 충분히 크다면, 고문도 허용될 수 있다.”는 포스너에 따르면, 인간의 평등, 존엄성, 프라이버시권과 같은 전통적 가치는 효율과 공리의 기준에 따라 대체될 수 있게 된다.(210면)

법경제학을 창시한 포스너는 미국 법학계에서 포스너리안(Posnerian)과 논포스너리안(non-Posnerian)으로 나뉘어 논쟁이 발생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법학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포스너와 법경제학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대다수 법학자가 추종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아성에 대한 쉬피오의 날 선 공격은 한국 법학계의 게으름과 둔탁함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노동법 전공자이기도 한 저자는 새로운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노동자가 가장 창조적인 일, 즉 원래적 의미에서 가장 시적인 일에 정신적 능력을 집중할 수 있다면 그 기술은 인간 해방의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컴퓨터를 노동의 인간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노동자를 컴퓨터의 모델에 맞추어 생각하는 한 그러한 가능성은 사라진다고 진단한다.(263면) 이는 오늘날 알고리즘으로 통제하는 플랫폼 노동시장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 되었다. 필자가 법학 분야 고전이 될 만하다고 예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혜안 때문이다.

저자는 국가를 중시하는 프랑스 전통에 따라 ‘국가의 몰락’(제10장)을 중요한 테마로 다루고 있다. 협치에 의한 통치로 가게 되면, 공(公)과 사(私)의 위계 전복으로 규범권력의 사유화가 초래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민영화로 나타난다고 한다.(286면) 민영화는 단지 사회국가의 서비스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이나 감옥의 관리 등 국가의 특권에 속하는 일부 기능도 대상으로 한다.(286면) 시장 논리로 진행되는 공기업의 민영화 추세는 우리나라에도 예외는 아닌데, 단순한 효율성의 논리로 대체할 수 없는 수도나 전력 같은 국가 기간 서비스, 나아가 사법시스템과 같은 국가 고유의 권능까지 사적 기관이 대체하고 있는 현상은 오늘날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구글, 애플과 같은 초국가적인 빅 테크(Big Tech) 기업은 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국 법에 따라 미국 법원에서 재판하도록 사실상 강제하는 약관을 두고 있어, 이들 기업과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 세계 이용자는 자국 법원과 자국법에 따른 권리구제를 받지 못하여 사실상 권리구제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주권의 일부인 사법권과 국민 입장에서는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라는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빅 테크에 대한 국제사법의 대응—구글 합의 관할 사건 판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국제거래법연구》 제31집 제1호, 2022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저자는 법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자기를 위한 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국제거래 분야에서 종래 재판관할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실체법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찾는 경향―이른바 ‘법 쇼핑’―이 있다고 한다.(291-292면) 저자는 법 쇼핑을 두고 차라리 ‘법을 이용한 지배’에 해당한다고 맹공을 서슴지 않는다.(292면)

끝으로 저자는 미국을 겨냥해 ‘제국적 국가와 초국적 기업의 주종관계’라는 제하에서 미국법이 해외에서 발생하는 사실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고 실제로 집행하는 사례를 들어 세계적 기업들이 미국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강한 힘을 가진 미국의 일종의 횡포에 대해 고발한다.(405-407면) 나아가 각종 세컨더리 보이코트(secondary boycott)를 통해 사실상 개별 국가의 법과 제도를 무력화하고 미국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4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자는 법치(法治)를 대신하고 있는 수치(數治)를 탈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법의 지배를 천명하게 한 것은 비인격적 권력에 대한 희구였으며, 숫자에 의한 협치는 비인격적 권력에 대한 희구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밀고 나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 간의 예속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가와 기업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수치(數治)는 실제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414면) 피타고라스 이래 사람들이 숫자에 매혹되어 왔다. 그런데 숫자에는 법을 계산에 종속시키는 위험이 존재한다, 법을 계산에 종속시키는 대가는 과도하다.(415면)

저자는 당분간 숫자에 의한 협치(통치)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인적자본’의 유동성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시장의 기획은 연대의 특징인 인적 ‘동맹’의 모든 형태를 청산하고자 한다는 점을 주시하고, 인간의 삶을 경제로 환원하지 않는 것, 그리고 경제를 시장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노동의 인간화, 기업가 정신, 상품과 서비스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강조한다.(417-418면)

오늘날 법질서의 구조화에서 봉건적 주종관계가 재부상하고 있는 현상은 국가를 부패시키는 미생물이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처럼 정글의 법칙이 재등장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419면)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온라인플랫폼법으로 약칭되는 플랫폼 규제에 관한 법안을 새 정부 들어서 전면 백지화하여 자율규제로 바꾼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글에서 자율규제를 하자는 것은 강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어 생태계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플랫폼 자율규제와 ‘밀림의 귀환’〉, 《한국경제신문》 2022.12.8.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2120711761)

저자는 수치가 득세하는 세상은 오히려 국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 원칙의 복원이 필요한데 이는 정치적 영역에서만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노동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노동의 목적과 의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되돌려줌으로써.”(418면) 마지막 문장이 역시 노동법 기반의 법학자답다.

독서 Guide

1.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격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보자.

2. 국가와 개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이야기해보자.

3. 바람직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책정보

숫자에 의한 협치

저자알랭 쉬피오

출판사한울아카데미

발행일2019.05.30

ISBN9788946071568

KDC360.1

서평자정보

남형두 ㅣ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남형두 ㅣ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로스쿨에서 저작권법을 가르치고 있다. ‘정직한 글쓰기’와 관련된 『표절론』, 문학·예술과 관련된 『문학과 법』(편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문화산업, 스포츠엔터테인먼트, 플랫폼 등에 관한 논문, 여러 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