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PICK 1 요약
1. 인류학자 조문영이 현장에서 만난 빈곤한 사람들의 이야기
2. 현장조사를 통해 찾은 빈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3. 인간 지구거주자와 비인간 지구거주자의 동거 가능성 타진
두 장면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탈출기〉에서 최서해는 이렇게 쓴다. “이러구러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기한(飢寒)은 점점 박두하였다.
일자리는 없고……. 그렇다고 손을 털고 앉았을 수는 없었다. 모든 식구가 퍼러퍼래서 굶고 앉은 꼴을 나는 그저 볼 수 없었다.
시퍼런 칼이라도 들고 하루라도 괴로운 생을 모면하도록 그네들을 쿡쿡 찔러 없애고 나까지 없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칼을 들고 나서서
강도질이라도 하여서 기한을 면하든지 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게 절박하였다. 나는 일이 없으면 없느니만치, 고통이 닥치면 닥치느니만치
내 번민을 컸다.”(최서해단편선, 《탈출기》, 문학과지성사, 2004, 25-26면)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 나는 ‘수원 세 모녀 사건’을 전하는 뉴스를 접한다. “A씨 가족은 채무 문제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살던 수원의 다세대 주택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40여 만 원 선인 것으로 파악됐다. A씨 등은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하지만 A씨 가족은 수원시에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상담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A씨의 주소지 자체가 화성시로 등록돼 있다 보니 절차상 신청이 불가했던 것으로
풀이된다.”(《노컷뉴스》, 2022. 8. 22)
“빈곤과 불평등은 부단한 과정이다”
인류학자 조문영의 책 《빈곤 과정》을 읽는 내내 이 두 장면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머릿속을 맴돌았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난을 둘러싼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적잖이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인간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를
피할 수 없다. 더욱이 가난 이야기는 이제 단순한 경제적 위기를 지나 관계적 위기, 정신적 위기, 정치적 위기까지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이를 두고 ‘가난 이야기의 진화’라 해야 할까.
《빈곤 과정》은 부제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이 말해주듯이 사회(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빈곤 문제를 파고든 책이다.
저자는 서울 난곡에서 중국 선양의 ‘조선인 타운’까지 다양한 현장을 오가면서 삶들의 미궁과 진창을 들여다본다. ‘점액질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경험적 연구 결과를 담고 있는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왜 어떤 사람이 빈곤 상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가난에 직면해
신산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서사를 통해 문제의식을 구체화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이다. 결과를 결과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 결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사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학적 빈곤 연구가 사회학적 연구나 경제학적 연구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빈곤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점액질의 구체적인 삶’ 그 이면을 투시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한편의 이야기로 구성해낸다. “빈곤과 불평등은 숫자로 축약할 수
있는 조건도, 스냅숏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도 아니다. 부단한 과정이고, 고된 분투에 가깝다.”(144쪽) 이 책의 제목이
‘빈곤 과정(Poverty as Progess)’인 이유이다.
글로벌 빈곤 레짐과 접속하는 한국 청년들
‘복지를 통합과 연대가 아닌 선별적 포섭과 배제, 사회적 버림의 표상’(34면)으로 만들어버린 국가 주도하의 사회 통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1장), ‘의존적 개인과 자율적・독립적 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의존을 통해 인간을 형성’(74쪽)한다는 전복적인
주장(2장)에 이어 이 책은 ‘새로운 배치를 통해 문제의식, 비판과 성찰, 개입을 통해 확장해내는 실험이자 운동’(324면)으로서 문화기술지를
펼쳐 보인다.
3장과 4장은 빈곤에 시달리는 중국의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기술지이다. 임금노동, 비공식 경제활동, 가사와 돌봄 노동 등
온갖 노동의 길을 거쳐 온 쭤메이의 이야기, ‘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농촌 출신 농민공 쑨위펀의 ‘비통함의 서사’는 다른 나라
얘기라고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다. 7장에서는 중국 둥베이 선양의 한인타운 시타(西塔)를 무대로 하여 하향이동과 실패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 이주자들을 추적한다. 한국인 이주자, 조선족, 북한 사람, 한족이 뒤섞인 이곳에서 나는 ‘빈곤 전염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먹고 먹히는 게임을 반복하느라 연대가 아닌 적대의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처지에
놓인’(308면) 사람들의 초상을 만난다.
각별하게 나의 관심을 끈 부분은 인류학적 한국 청년 담론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5- 6장 및 8장이다. 5장과 6장은 글로벌 빈곤 레짐에
휘둘리는 청년들의 행동과 심리에 초점을 맞춘 문화기술지이다. ‘전 세계 인구 67억 명 가운데 하루에 1달러 25센트도 안 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무려 14억 명에 이르는’(198면), 나아가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한국의 청년들은
실존적 결핍과 불안에 시달린다. 그들은 정부와 기업, 대학의 ‘교활한 후원’ 아래 글로벌 빈곤 레짐과 접속하면서 ‘전사’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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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 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受援國)에서 공여국(供與國)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 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 글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에도 경쟁력과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 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211~212면
대학생 자원봉사단을 통해 글로벌 빈곤 레짐과 접속하는 한국 청년들의 심리적 풍경을 묘사한 후 저자는 8장에 이르러 그들의 불안과 가능성을
〈빈곤의 인류학〉이라는 대학의 수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수업의 테마는 ‘한국의 반빈곤운동과 대학생 청년과의 마주침’이다.
그 마주침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나(들)’을 만나 회의하고, 성찰하고, 비판하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한국의 청년들이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길을 찾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빈곤의 인류학〉은 청년 담론을 고민하는 이들(특히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구생활자의 미래?
그런데 빈곤 문제는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빈곤산업, 자원봉사, 사회운동, 대학 수업, 이주 커뮤니티의 소문 등을 경유하면서
인간의 빈곤 문제를 탐사해온 저자는 9장에 이르러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약탈에 고통 받는 비인간 생명체로 눈길을 돌린다. 팬데믹과 기후변화가
웅변하는 것처럼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의 꿈에 중독된 인간들은
‘동족’뿐만 아니라 비인간 지구거주자가 겪고 있는 빈곤 문제에도 좀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다. 전 지구적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허한 울림만 남길 따름이다.
그럼에도 “기후변화의 파괴적인 힘에 누구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저희끼리의 싸움을 접고, 지구의 시간에 ‘인류’라는 문구를 새기는 데
공로가 큰 자본에 공동으로 저항할 방도”(374면)는 없는지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인간이 취약하고 유한하며 그런
까닭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비인간 자연의 취약성, 의존성, 유한성이 더는 ‘장애’ ‘비정상’ ‘비효능’
‘무능력’ 같은 꼬리표를 달지 않고 지구생활자의 존재 양태로 인정받는 세계”(389면)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역량에 따라 지구와 지구생활자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가난에 번민하는 「탈출기」의 ‘나’와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선택한 수원의 세 모녀의 모습에 인간의 무자비한 약탈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비인간 지구거주자의 일그러진 표정이 겹쳐진다. 빈곤은 경제적인 문제인가 정치적인 문제인가. 빈곤에 대한
인간의 공감능력과 윤리감각은 고갈되고 말았는가. 인간의 빈곤과 비인간 지구거주자의 빈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정녕 인간은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고야 말 것인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물음에 물음이 끊일 줄 모른다.
독서 Guide
1. 인류학적 빈곤 연구의 특징은 무엇인가.
2. 빈곤을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3. 양극화의 심화는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책정보
빈곤 과정
저자조문영
출판사(주식회사)글항아리
발행일2022.11.07
ISBN9791169090490
KDC334.21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