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생리를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 보다
발자크(1799~1850)가 1842년에 쓴 이 책은 180년이 지났지만 마치 요즘 한국의 언론을 그린 것과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생생하다.
‘기자 생리학’이란 제목은 번역 과정에서 붙여진 것으로 원제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파리 언론에 관한 단독 연구’ 정도일 것이다.
《공무원 생리학》(Physiologie de I’Employé)과 함께 발자크의 생리학 시리즈로 묶어 내면서 원제와 무관하게 ‘생리학’이 붙은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의학용어를 빌려 생리학이란 이름의 문학 장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공무원 생리학’이나 ‘기자 생리학’
모두 그 직업의 실태와 메커니즘을 파헤쳤다는 점에서 번역서의 제목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생리학 못지않게
분류학/계통학의 요소가 전편에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오늘날 언론 환경에 그대로 적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고 할 정도로 기자 — 공론의 장에 글을 쓰는 이 —의 생리를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 분석하고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중에 ‘이 부분은 지금 누구와 비슷하고, 저 부분은 어떤 신문 이야기네...’하고 연상하거나
지목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쉽거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거론하는 당대의 기자(글 쓰는 이)에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시이에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볼테르(Voltaire, 1694~1778), 뒤마(Alexandre Dumas Père, 1802~1870), 위고(Victor Hugo, 1802~1885) 등
프랑스 혁명 전후에 글로 세상을 변화시킨 이들이 나오는가 하면, 당대에 이미 스러져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대 프랑스의 정치, 사회, 문화, 학문 코드를 알고 있어야 한다.
발자크는 기자 품종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화를 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오답 노트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하고 그 이면에 담긴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는 식으로 가상의 기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론 비틀고 익명화했지만, 당대에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이 책이 나왔을 당시 기자들에게 발자크의 펜은 폐부를 찌르는 칼이었을 것이다.
발자크의 ‘기자’ 분류
먼저, 이 책에 나오는 ‘기자’는 오늘날 신문—당시에는 없었던 방송 포함— 기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발자크는 기자를 두 개의
종(種)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종’인 ‘논객’에 신문 기자, 기자 겸 정치인, 팸플릿 작가, 공염불하는 자, 직에 연연하는 자,
하나만 우려먹는 자, 번역 기자, 신념 작가가 들어 있고, ‘두 번째 종’인 ‘비평가’에는 구식 비평가, 금발의 젊은 비평가, 대비평가,
문예 비평가, 군소 신문 비평가가 들어 있다. 소제목만 보더라도 전업 기자 외에 교수, 비평가 등 언론에 글 쓰는 사람을 통칭하는
넓은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자크는 결론부의 첫 문단에서 “언론은 정치와 문학 분야에서 정기적으로 출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p.260)라고
정의하고 있다. 역자 주에 따르면, ‘논객 종’과 ‘비평가 종’의 원문은 ‘Genre publiciste’, ‘Genre critique’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퍼블리시스트’를 ‘기자’(journaliste)로 번역하지 않은 것은 ‘기자’가 ‘publiciste’의 하위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p.10).
구텐베르크(1400?~1468)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출판 산업이 발전하여 책을 읽는 사람의 수가 이전 시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시민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등 근대를 상징하는 일련의 시대 변화를 촉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연장선에 있는 발자크 시대
프랑스에는 많은 작가가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독자 수의 한계로 벌이가 넉넉하지 않았고, 작가들의 상당수는 신문에 글을 써서 원고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발자크가 이 책에서 다루는 기자에 문인이 폭넓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자크는 넓은 의미에서 문인협회에 속한 ‘기자’를 두 개의 종으로 나누고, 다시 그 하위 품종으로 갈래 쳐서 그 행태와 속성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발자크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책 말미에 다음과 같은 표로 요약해 놓았다(pp.267-268).
서평자가 그 상관관계를 논증할 수는 없지만, 위와 같은 계통/분류는 오늘날 생물 분류학을 있게 한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지구상에 서식하는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린네 이전에도
동식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듯, 발자크 이전에도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 분석철학과 합리주의의 영향은
린네와 같은 생물 계통학을 낳았고, 이런 방법론은 발자크가 기자를 분석할 때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기자라고 해서 다 같은 성격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글의 대상이 다르기도 하여 기자 전체를 하나로 품평하는 것은 마치 둔탁한 망치로
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의 성격, 글이 다루는 대상, 출입처 등에 따라 기자를 분류하고 이들의 속성을 분석한다면 정확히 찔러야
할 곳만 찌르는 송곳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기자 생리학》은 송곳과 같은 보고서이다.
전통 미디어 구도의 균열
지금으로부터 180년 후인 2203년에 자국을 넘어 외국의 언론 상황에도 통할 수 있는 비평서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이르면
발자크와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론과 그 주변 환경은 수백 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널리즘의 환경, 즉 불특정 다수의 독자와 사건·사고에 대한 보도, 논평 등 글을 쓰는 소수의 기자,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해주는 매체(신문, 방송 등)의 구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 사이 이런 강고한 구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세계를 변화시켰는데 언론 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발자크 시대에는 없었던 방송도 전통적인 신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발화자와 수신자(독자)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제 인터넷 시대에서는
기자, 대학교수 등 문필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자기 생각을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릴 수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통해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발자크가 말한 기자(논객 종, 비평가 종)에 전통 미디어(legacy media)의 벽을 허문
‘1인 미디어’도 포함될 수 있고, 이론적으로 세상사람 누구나 ‘기자’ 군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분명 전통 미디어의 장악력은 약해지고 언론이라는 공기(公器)가 소수에 독점되었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반면에 공론의 장을 통해 수렴되었던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기 흩어지게 되었다. 탈중심화(decentralization)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점도 있으나, 단순한 ‘허위 정보(misinformation)’를 넘어 ‘날조된 허위 정보(disinformation)’가 유포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폐해가 만만치 않다. 이는 이미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전통 미디어가 장악하고 있는 구도에 균열이 생긴 인터넷 시대에서 이 책은 새롭게 쓰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비단 기자직
외에도 곡학(曲學) 또는 곡필(曲筆)하여 아세(阿世)하고 세상에 영합(迎合)할 가능성이 있는, 글 쓰는 직업의 본질적/태생적 한계에 대한
발자크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