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PICK 1 요약
1.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김주혜의 장편소설
2. 평안도 포수의 아들 남정호의 삶과 저항
3. 기생 출신 배우 겸 무용가 안옥희의 삶과 사랑
한국문학의 범위를 둘러싼 물음들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문 강의를 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 있다.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혹은 교과서적인 정의는 이러하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정서를 표현한 언어예술.’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좁은 정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근대 이전 이 땅에서 한문으로 쓰인 문학작품은 어찌할 것인가.
식민지 시대 조선인 문인들이 일본어로 쓴 글들은 어디에 귀속될 것인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한국계’ 작가들이 외국어로
한국인의 삶과 정서와 사상을 표현한 시와 소설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거꾸로, 귀화한 ‘외국계’ 한국인이 한국어로 그들
국가(또는 민족)의 이야기를 쓴 작품들은 한국문학인가 아닌가.
작가의 국적이나 언어 또는 내용을 기준으로 특정 작품을 특정 국민국가에 귀속시키는 데 따르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않은 질문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김은국의 《순교자》, 이창래의 《생존자》와 《척하는 삶》, 이민진의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가 영어로 쓴 작품들이다. 국적과 언어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소설들은 모두
미국문학에 속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한반도의 역사로부터 분리할 수 없으며 주요 인물들 역시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서와
사상 또한 지극히 ‘한국적’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한민족 문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의
핵심적 구성 요소가 혈통과 더불어 언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다.
또 다른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의 ‘귀향’
기준을 바꿔보면 어떨까. 문학을 특히 소설을 자기탐색의 서사라고 한다면, 잠정적으로나마, 정체성(identity)을 하나의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소설은 작가 자신이나 그 선조가 탯줄을 묻은 땅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그 역사와
문화와 삶으로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의 문학적 형식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문학이 그렇듯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들의 작품도,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탐색 여부는 한국문학을 (재)정의하는 데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을 터이다.
(한국문학의 기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 기준에 따라 범위와 내용도 다양해지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외재하는 내부’로서, 다시 말해 ‘대한민국 국민’은 아니지만 이 땅의 역사 및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존재로서 한국계 작가는
한국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내포를 심화는 데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은국, 이창래, 이민진 등과 더불어 미국 시민권을 가진 또 다른 한국계 작가 김주혜의 ‘귀향’이 반가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김주혜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후 온라인 잡지 편집자,
에세이스트, 번역가로 활동해 왔다. 그리고 6년에 걸쳐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집필한다.
출간되자마자 영어권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 소설은 12개국 이상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영어로 쓴 한국인의
이야기가 세계인의 감성과 의식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은 땅’에서 힘겨운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소설은 이민진의 《파친코》와 더불어 소설의 존재 의의를 새삼 확인할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야수들’의 이야기
《작은 땅의 야수들》은 ‘작은 땅’ 즉 한반도에서 1917년부터 1965년까지 고난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야수들’이라 했을까. 일본군 장교 이토 아쓰오는 옥희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이 작은 땅에서 어떻게 그리도 거대한
야수들이 번성할 수 있었는지 신비로울 따름이야. 야생에서도 직접 한 마리 사냥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제 조선의 호랑이들은 거의 확실히
멸종했다고 봐야지.”(513면)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이토는 이 땅의 야수들까지 씨를 말리려 한다. 여기에서 야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조선 사람, 특히 민중들이다.
이 소설의 핵심적인 인물=‘야수’(!)는 두 명이다. 하나는 평안도 포수 남경수의 아들 남정호(南正虎), 다른 하나는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난 안옥희. 옥희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 라인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기생 은실과 단이, 은실의 딸 월향과 연화의 이야기가 배치되고,
정호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 라인에는 청계천의 거지 동료들 영구와 ‘미꾸라지’, 정신적 스승인 명문가 출신 공산주의자 이명보와 그의 친구
김성수의 이야기가 배치된다. 두 스토리 라인 사이에 한철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한철은 옥희와 정호를 분리하면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일본군 고급장교 하야시, 야마다, 이토가 개입한다. 이 가운데 비교적 자유적인 성향의 야마다 겐조는 이야기 전개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정호의 아버지 남경수에게 준 ‘은제담뱃갑’은 은실이 선물로 준 은반지와 함께 이 소설을 관통하는 서사적 매개물이다.)
아버지를 여읜 후 경성으로 올라온 ‘정의로운 호랑이’ 정호는 거지왕초 생활을 하다 공산주의자 이명보를 만나 항일운동가로 거듭난다.
은실이 운영하는 평양의 권번에 팔린 옥희는 경성으로 올라와 단이의 보호 아래 기생이 되었다가 배우로, 예술학교 무용교사로 살아간다.
하얼빈에서 일본인 부총독을 사살한 후 경성으로 돌아온 정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옥희를 살뜰하게 돌봐주지만,
옥희의 마음은 인력거꾼이었던 김한철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한철은 옥희의 사랑을 뿌리치고 갑부 김성수의 딸 서희와 결혼해 사업가로 성공한다.
1964년 정호는, 그의 스승 이명보가 해방 후 그러했듯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사형에 처해진다. 호랑이의 죽음 또는 멸종!
이러한 현실에 깊이 좌절한 옥희는 제주도로 내려가 해녀가 된다.
‘야수-호랑이들’의 죽음, 그 후
이름뿐인 독립과 실질적인 번영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중요하겠냐며 저항운동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친구 김성수에게 이명보는
이렇게 말한다.
"
"
“맞아, 나는 죽는 것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자네처럼 우리의 저항이 모두 헛되다고 보진 않아. 자네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도움은
진정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으로 받고 있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운동의 목적은
그저 멸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평행선상으로 계속 되돌아오고 있다는 거 알겠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어. 내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겠네. 나는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걸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
- 192~193면
현실적 이해관계를 넘어 자신의 영혼이 시키는 대로 정의를 위해 저항했던 ‘호랑이들’은 죽었다. 이명보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남정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것을 그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만 해야 할 것인가. 자신의 현실적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자들은 살아남고, 정의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인가.
작가는 몽상가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다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415면)라고 말하거니와, 패배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야수들’,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압제 속에서 소중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야수들’, 그 정의롭고 아름다운 ‘야수들’의 모습을 ‘유화’로 그려낸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역사의
이면에 흔적처럼 번지는 진실의 무늬를 읽는 몽상가가 될 수 있을 터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역사적 상상력과 소설적 상상력의 접점에서 튀는,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스파크와 같은 소설이다. 그 스파크가 정의롭고
용맹하며 아름다운 새로운 ‘야수들’의 부활을 알리는 불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어둠의 시대, 시대의 어둠을 밝힐 그 불꽃 말이다.
독서 Guide
1. 김주혜와 같은 한국계 외국인 작가가 한국문학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2. 《작은 땅의 야수들》의 인물관계도를 그리고 각각의 인물의 특징을 말해보자.
3.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역사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책정보
작은 땅의 야수들
저자김주혜
출판사다산북스
발행일2022.09.28
ISBN9791130693927
KDC843.6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