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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또는 질문과 대답의 향연

- 김용옥, 《도올주역강해》

작성일: 2022.12.01

이 주의 히든북 요약

1. 우리 시대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도올 김용옥

2. 동양인의 사상적 고층에 자리 잡은 󰡔주역󰡕의 독창적 번역

3. ‘나’ 실존적 물음과 󰡔주역󰡕의 대답

나의 사상적 대학의 커리큘럼

그럴 때가 있다. 생각의 졸가리가 좀처럼 잡히지 않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무력감에 시달릴 때,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손이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럴 때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도올에게 기댄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올의 책을 읽는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독창적인 해석, 현실 문제를 향한 발언과 제언, 그리고 고도의 지적인 언어와 일상의 속어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카니발적 문장……. 그의 책을 읽다보면 부옇던 머리가 점차 맑아지기 시작한다. 그의 첫 번째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1986)를 만난 게 1988년, 그 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도올은 나의 스승이자 멘토이자 동지이기도 했다.

한두 번 가벼운 인사 말고는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나는 그를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 공자와 맹자와 노자를 배웠고, 그의 복음서 해설과 전기를 통해 예수를 알았으며,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따라 읽으면서 동학사상의 거대한 물줄기를 가늠할 힘도 얻었다. 이쯤 되면 그의 방대한 저작물은 나의 ‘사상적 대학’의 필수 커리큘럼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문헌학자이자 사상가 도올

도올 김용옥은, 내가 아는 한, 탁월한 문헌학자이자 번역가이다. 고전 한문뿐만 아니라 희랍어와 라틴어에서부터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그는 폭넓은 언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텍스트 비평을 수행한다. 그리고 심도 있는 문헌학적 이해를 토대로 다양한 고전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한다.

그의 번역은 단순히 출발어(외국어)를 도착어(한국어)로 바꾸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독자에게 의미 맥락을 자신의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의 번역은 ‘다시 쓰기’에 가깝다. 이와 같은 번역 방법을 두고 이견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번역은,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한 것인지 대단히 의심스러운, 생경하기 짝이 없는 많은 고전 번역에 비하면, 독자들에게 텍스트의 전후 맥락을 가능하면 상세하게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문헌비평과 번역을 거쳐 그는 철학적 사유로 나아간다. 번역에 동반하는 방대한 분량의 해설과 해석(또는 주석)은 그의 저술이 보여주는 하나의 패턴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해설과 해석을 통해 독자는 철학자로서 그의 사유가 지향하는 바를 가늠할 수 있다. 철학자로서 도올이 구축하고자 하는 논리체계의 윤곽은 그다지 선명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를 하나의 굳건한 체계로 정립하려는 욕망보다 자신의 사유를 텍스트의 의미 맥락 속에 흐르게 하려는 욕망이 훨씬 강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를 우리 시대의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골방에서 체계 구축에 골몰하기보다 지금-여기 현장에서 인류의 인문적 유산이 숨 쉴 수 있게 할 것! 그가 왕성한 저술과 함께 열정적인 강의에 혼신의 힘을 쏟는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가 아닐까.



《주역》의 독창적 번역과 해설

《동경대전》(2021.4)과 《용담유사》(2022.1)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도올주역강해》(2022.8)라는 우람한 책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유튜브 채널 도올TV를 통해 123강에 이르는 《동경대전》 강의를 들은 사람으로서 그의 왕성한 저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고희를 넘긴 지 한참 지난 그를, 몸의 탈진과 극도의 정신적 피로를 무릅써야 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소명의식? 사명감? 학문적 유희? 어느 것이든 자신의 피와 땀과 혼이 깃든 앎의 결정체를 아낌없이 책으로 내놓고, 또 강의를 통해 더욱 쉽게 전달하려 애쓰는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얄팍한 지식을 권력으로 여기고 알쏭달쏭한 난해한 언어로 치장하기 일쑤인 기능적 지식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경지인 까닭이다.

《도올주역강해》는 모든 경전 중에서도 으뜸가는 경전이라 하여 군경지수(群經之首)라 불리는 《주역》을 정밀한 문헌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번역하고, 여기에 상세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더한 책이다. 도올의 다른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에서도 번역과 해석은 동시적이며 상호적이다. 엄정한 텍스트 비평 과정은 번역과 해석을 동시에 염두에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학의 전례대로 《주역》 또한 ‘경(經)’과 ‘전(傳)’으로 나뉘는데. 이 책은 몸통이라 할 수 있는 ‘경’에 속한 64괘와 384효의 괘사와 효사를 번역하고 해설한 것이다. 《주역》의 괘는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음효(--)와 양효(─)에서 출발하여 사상(四象)과 팔괘를 거쳐 64괘에 이른다. 64괘에는 괘상, 괘명, 괘사가 있고, 각 괘의 여섯 개의 효마다 효사가 있다. 바로 이 64괘와 각각의 효에 우주론과 인생론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간단명료한 상징체계가 동아시아에서 “철학사상은 물론이고, 윤리도덕, 문학예술, 정치이론, 심지어는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15쪽)



실존적 질문과 ‘변화의 책’의 대답

그럼에도 근대에 이르러 《주역》은 일종의 ‘점술을 기록한 책’으로서, 길거리나 음습한 골방에서 미래를 예언하는 데나 소용되는 책자 정도로 평가절하 되어 왔다. 경전이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의도적으로 오독되거나 무지에 의해 오염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주역》만큼 오독과 오염에 시달린 경전도 드물 것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s)’이라고 불리는 《주역》은 삼라만상을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음양의 감응과 생성 그리고 변화야말로 간결하기 그지없는 ‘역(易)’의 사상적 핵심이다. 하나의 진리나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이 개입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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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易)은 변화이며, 변화는 우주생명의 창진(創進, Creative Advance)이며, 우주생명의 창진이란 우주를 구성하는 기(氣)의 끊임없는 순환을 의미한다. 역은 곧 우주이다. (……)
우주는 시공연속체(Space-time continuum)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공연속체를 동방의 고대인들은 ‘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별도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역이라는 생성의 변화 속에 있는 방편이다. 역의 변화이며, 시공이며, 우주이다. 그러므로 우주 속의 어떤 존재도 시공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 우주, 그 전체는 역 속에 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1면

시간상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주가 그렇고, 생명이 그렇고, 권력이 그렇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세상에든 저 세상에든 영원불변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한다. 또,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점을 통해 운명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듯이 인간의 운명이나 운세는 나라는 존재의 실존의 문제이지 점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점을 치게 되는 것은, 나의 지력이나 노력으로 선택의 기로가 열리지 않는 극한상황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소리는 결코 점쟁이를 통하여 들리지 않는다. 하느님의 소리는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다.”(34쪽) 그러니까 질문과 대답의 책인 󰡔주역󰡕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관련해 질문을 던지고 변화의 흐름 속에서 대답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절실한 질문과 삼라만상에 깃든 하느님의 성실한 대답, 그 사이 어디쯤에 󰡔주역󰡕의 비유와 상징의 언어가 놓여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인류정신의 기적이요 인간 언어의 최상품’인 󰡔주역󰡕이 도올의 손길을 거쳐 우리 앞에 선물처럼, 질문과 대답의 향연처럼 다가왔다. 64괘가 담고 있는 고도의 시적 언어의 비밀에 한 발짝씩 다가가면서 환희와 전율의 시간을 만끽할 때이다.

독서 Guide

1. 우리 주위에서 《주역》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2. 《주역》이 오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3. 변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책정보

도올주역강해

저자김용옥

출판사통나무

발행일2022.07.25

ISBN9788982641534

KDC141.2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