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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사람이 살아 낸 유머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성일: 2022.11.17

이 주의 PICK 1 요약

1. 《빨치산의 딸》과 데칼코마니 같은 소설

2. 끝까지 진지한 혁명가의 삶은 산 아버지와 이것을 유머 감각으로 여유롭게 바라보는 주인공.

3. 고통의 세월을 겪어 죽음 앞에서 풀어내는 화해

데칼코마니 같은 두 소설 사이의 세월

먹먹한 아픔으로 읽었던 소설이, 물경 30여 년 전,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었다. 민주화가 꽤 진전을 이룬 시점이었다고는 하나 이 소설에 대한 사법 당국의 태도는 완강했다. 하기야 빨치산이 아군이요 국군은 적으로 그려진 소설을 보며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저 소설과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며 여러 생각에 잠긴다.

우선 50대 중반에 이른 정지아의 품이 넓어 보인다. 자신은 브루주아적 삶에 충실히 순치된 존재라 여기는 것 같지만, 나는 소설가로서 단단하고 커진 정지아를 반갑게 만난다. 소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새삼 알게 된 숨겨진 삶을 풀어나간다. 간간이 보이는 ‘그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는 구절처럼, 꼼꼼히 조사하여 이미 한 권으로 풀었지만, 말하지 못한/말할 수 없는 사연이, 아버지의 전 생애를 다시 그리게 한다.

사실 정지아가 쓴 아버지의 생애 전반은 빨치산으로 활동한 ‘1948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4년으로 응축된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그것이 전 생애를 결정지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252면)라는 이 뼈아픈 통찰―. 다만 정치적으로 박제되었을지 몰라도 살아있는 생활이 누벼지는 생애 후반은 도리어 진정 해방된 자의 삶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두 소설이 아버지를 축으로 찍힌 데칼코마니 같다고 했다.



진지와 유머가 교차하는 여유

아버지 ‘고상욱’ 씨는 어느 날 돌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 한다. 그것을 작가는 ‘혁명을 목전에 둔 듯 진지한 그들의 어떤 행위나 삶의 방식이 유머’(7면)로 보인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얼마나 진지했던가. 그것이 작가에게는 어떻게 유머로 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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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어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눈빛은, 누군가 사진으로 그 찰나를 포착했다면, 처형 직전의 독립운동가나 학살당한 동지의 시신을 목도한 혁명가라 해도 믿을 만큼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내가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찰나, 어머니가 꽁무니를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 12-13면

산촌에 찾아들어 오갈 데 없어진 ‘방물장수 여인네’를 하룻밤 재운다고 데려온 아버지, 어머니는 그 여인이 묻혀올지 모를 ‘베룩’이 두려운데, ‘사회주의자요 혁명가’의 화신으로서 아버지는 순수 그 자체로 진지하다. 여고 2학년 때 이 일을 목도한 작가는 ‘풋, 웃음을 터뜨리려는’ 유머 쪽의 캐릭터이다.

여인네는 결국 벼룩을 남겨놓고 이 가난한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마늘 반접을 훔쳐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오죽하먼 그깟 것을’이라고 여길 뿐이다. 순수하다 못해 ‘물정 모르는 촌뜨기’였다. 소설은 줄곧 이 진지와 유머 사이를 교차하며 나간다. 나는 그것이 《빨치산의 딸》에서 보이지 않던 정지아의 여유로 보였다.



고통의 세월을 살아낸 진정한 민중은 누구인가

죽어 이별하는 자리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빨치산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당했던 사람들과의 화해이다. 연좌제에 걸려 육사에 합격하고도 입학하지 못한 사촌오빠―. 답답한 생애의 원인을 제공한 작은 아버지의 영전에 찾아온 그 또한 큰 병에 걸린 몸,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85면)는 뒷모습이 안타깝다.

문상 온 낯선 여자를 맞아 어머니가 일러준 ‘느그 아부지 첫 번째 마누래 동생’―. 아버지는 집안에서 정해 준 처를 끝내 버리는데, ‘한때는 아버지의 처제였던 양반이, 자기 언니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형부의 현재 마누라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형부의 장례식에 찾아온 것’(163면)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절정은, 형이 빨치산으로 출세한 줄만 알았던 철없던 어린 동생―. 동생은 군인에게 뽐내듯 형의 신분을 밝힌다. 그길로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철이 들어서는 술 없이 살지 못하는 폐인이 되고 마는데, 평생 원수처럼 대했던 형이나, 끝내 장례 막바지가 되어서야 영전을 찾는다. 작가는 무엇보다 그런 작은 아버지를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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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 130면


이 소설의, 무엇보다 참된 민중의 큰 힘은 어려운 처지를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독서 Guide

1. 《빨치산의 딸》과 《아버지의 해방일지》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2. 죽음의 자리가 화해의 자리가 된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3. 참된 민중의 힘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책정보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정지아

출판사창비

발행일2022.09.02

ISBN9788936438838

KDC813.7

서평자정보

고운기 ㅣ 시인·한양대 교수

고운기 시인 한양대 교수 이미지

‘삼국유사’와 관련된 고전문학의 다양한 면면을 연구하면서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 30여 권의 저서와, 시집으로 『구름의 이동속도』 등 1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