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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삶, 존엄한 죽음품격 있는 삶, 존엄한 죽음

- 페터 비에리, 《삶의 격》

작성일: 2022-11-10

이 주의 PICK 1 요약

1. 스위스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소설 같은 에세이

2.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성찰

3. 무력감과 굴욕에 저항하여 획득한 품격 있는 삶과 죽음

어느 요양병원의 풍경

몇 년 전, 의사 노릇 하는 친구가 새롭게 연 요양병원을 찾은 적이 있다. 가을이었을 것이다. 포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안긴 갯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질였고, 음식점으로 채워진 건물들 사이 아스팔트 위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이 스산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흩뿌릴 것만 같았다. 그날의 하늘을 닮은 잿빛 빌딩의 4, 5, 6층이 요양병원이었다. 친구의 안내로 원장실에서 식당을 거쳐 입원실을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나는 현기증 때문에 몇 번이나 계단을 헛디뎠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퀭한 눈동자가, 보행기를 붙들고 서서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이, 바삐 오가는 간호사에게 쉼 없이 뭔가를 하소연하는 노인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자꾸만 나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다투며, 그렇게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인간의 삶이 막바지에 도착하는 곳이 요양병원이란 말인가. 나는, 아무리 철저하게 살균처리를 해도 숨길 수 없는, 죽음의 냄새에 뒤섞인 돈 냄새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채 꽤 오랫동안 끌려다녀야 했다.



‘온전한 죽음’과 품격 있는 삶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무덤을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노년과 죽음은 가장 확실한 미래인 까닭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돈방석을 ‘온전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보루로 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종교적 믿음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성채로 삼는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품격이 지켜지도록 대접을 받는 삶, 내가 다른 사람의 품격을 훼손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삶, 내가 스스로를 존엄성을 갖춘 존재로 자각하고 품격 있게 대하는 삶의 끝에 죽음이 놓여 있다면 어떨까.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지적이고 낭만적인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스위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페터 비에리의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에세이 《삶의 격》을 읽으면서, 특히 마지막 장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금 죽음에 대한 상념의 심연을 헤엄쳐 나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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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또는 질병으로 인해 주체성으로서의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누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의 과정일 뿐이다. 결국에는 관계를 이어갈 배우자도 곁을 떠나간다. 누군가를 만나고 대면할 일이 없다 보니 점점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고 마침내는 고독해진다. 친밀감과 애정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독립성의 상실과 친밀한 인간관계의 상실, 이 두 가지는 존엄성을 위험에 빠뜨린다. 또한 인간 소멸의 맨 마지막 과정인 죽음은 존엄과 무관하지 않다. 소멸과 종말의 과정에서 맞이하는 고통스럽고 쉽지 않은 경험을 어떻게 하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 399면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결국은 죽음에 이를 삶의 과정에 대한 깊이 있고 담대한 통찰을 내면화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 누가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을 품격 있게 대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길 중의 하나가 예속적인 삶, 굴욕적인 삶, 동정을 구걸하는 삶, 무력감에 허우적대는 삶이 아니라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고 사는 삶이 아닐까.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내는 삶은 죽음의 순간에도 존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페터 비에리가 하나의 예로 제시하는, 굴욕적인 생명 연장을 거부하고 요양병원을 뛰쳐나와 아테네로 향한 어느 라틴어 선생의 삶과 죽음을 떠올려보라. 아니면, 격조 있는 삶을 살아온 아내가 치매의 덫에 걸리자 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자기 결정’에 따라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자신마저 생명을 내려놓는 영화 <아모르>를 떠올려보라.



뭔가에 ‘처리당하고’ 싶지 않다면

푸르디푸른 하늘, 환한 햇살, 색색으로 물든 이파리를 달고 서 있는 나무들, 가을빛을 분주하게 쪼고 있는 까치 몇 마리……. 일 년 동안 며칠이나 이런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맑은 날이 이어지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 하나가 전에 없이 신비롭고도 소중하게 와 닿는다. 계절 탓일까. 아니면 ‘수상한 세월’ 탓일까. 가을의 향연이 한창인 풍경 어디쯤에서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쉼 없이 떨린다. 빛과 그림자 사이의 떨림을 삶의 순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아슬아슬한 떨림의 연속이 우리의 삶일진대 한 순간 한 순간은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방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감정을 내팽개치기도 한다. 남을 비웃고 조롱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으며, 돈의 유혹에 이끌려 모욕적인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다양한 문학작품들에서 찾은 풍부한 사례를 활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가면서 삶의 격조, 인생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삶의 격》을 읽어가다 보면, 환청처럼 곳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이토록 소중한 삶의 순간을 언제까지 다른 무엇에 질질 끌려 다니며 낭비할 것인가. 죽음까지 포함한 내 삶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진정 뭔가에 의해 처리당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권력이든, 명예든, 돈이든, 나의 삶과 죽음이 굴욕적이고 모멸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겨울이 오기 전에 페터 비에리의 책 《삶의 격》을 찬찬히 읽어보는 게 어떨까.

독서 Guide

1. 죽음에 대한 통찰은 삶에 어떤 변화를 야기할 수 있을까?

2. 존엄성을 지키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3. 삶의 품격과 존엄성을 훼손당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책정보

삶의 격 표지이미지

삶의 격

저자페터 비에리

출판사은행나무

발행일2014.10.29

ISBN9788956608075

KDC165.7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