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PICK 1 요약
1. 오랜만에 만나는 거장의 귀환
2. 여정에 주목한 안중근과 이토
3. 서술 위주의 소설 문법의 파괴인가
이동의 방식과 위험
전동휠체어의 맛을 알아버린 후배 장애인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온다. 나더러 어서 빨리 전동휠체어를 장만하라는
것이다. 수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원하는 곳 멀리멀리 다닐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다.
작가 김훈은 자전거 타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글 쓰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도
자전거를 타는 듯하다. 자전거의 기본적인 속성은 이동이다. 그것도 남들보다 빠르지만 또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 것이
자전거 이동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동과, 여정, 여행에 관심이 많다.
그의 소설 하얼빈은 로드무비다. 로드무비의 대표적인 영화는 1969년 작 <이지라이더>.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주인공 라이더는 별다른 목적 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기나긴 이동은 결국 죽음을 부른다.
이동은 곧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전에 없던 안중근 이야기
주인공 안중근은 열사이며 동양평화를 부르짖은 인물이다. 식민 통치를 기획하고 디자인한 적국의 핵심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총알 몇 방으로 저격했기 때문이다. 모든 독자의 스포트라이트가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작가는 일개
청년 안중근이 하얼빈이라는 멀고 먼 동북의 낯선 도시로 이동해 마치 죽으러 그곳을 온 것 같은 이토의 여정과 겹치게
만들었다. 새로운 접근방법이다. 통상의 위인과 통상의 영웅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기존 소설문법에
익숙한 독자는 당황한다. 독자는 대개 안중근의 새로운 면, 안중근의 몰랐던 사실, 감춰진 비밀이 작가에 의해 실증적으로
재창조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런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상당 부분의 이야기들이 더 모호하고 더 알 수 없게 꾸며져
있다. 주인공들은 파편적이다. 그들의 대화 역시 살아있는 사람의 대화가 아니다. 건조하기 짝이 없으며 메시지 전달에만
충실하다. 작자의 소설 문법이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군더더기가 없다. 가끔은 투박하고 거칠어 읽어내기 힘들 때도 있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다 이동하고 있다. 안중근과 심지어는 그의 본당신부인 빌렘까지도 이동하고 있다.
빌렘이 여순까지 가서 안중근을 만나는 것은 주교의 뜻을 거절하는 일종의 거역이다. 신부가 순종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크나큰 사건이지만 작가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동해서 안중근에게 갔다는 사실만 핵심이다. 심지어는 안중근의
아내까지도 하얼빈으로 솔가해서 이동해 온다. 역사적으로는 합당한 실제 이유가 있었겠지만 작가는 관심이 없다. 이동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다. 동료인 우덕순 역시 별 이유 없이 이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작품 속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민족을 대표해 안중근이 얼굴도 모르는 이토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두 사람이 제대로 이동해서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에 있느냐이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도 알 수 없다.
"
"
열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차창에 물방울이 달렸고, 먼 들의 가장자리로 불빛 몇 개가 흘러갔다. 열차 안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이토를 쏘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열차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여러
갈래의 철길이 망막 안쪽에 떠올랐다. 권총은 외투의 왼쪽 안주머니 속에 있었다. 안중근은 심장을 누르는 권총의
무게를 느꼈다. 권총은 묵직했는데 너무 무겁지는 않았다.
- 137면
이동한다, 움직인다, 살아있다
작가의 애정 하는 이동수단인 자전거는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다. 사람이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동차도 아니지만 또한 충분히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이송 도구이다.
이동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다. 이동하고 움직이는 이토를 이동하고 움직이는 안중근이 죽인 것, 이것이
역사의 인과관계이며 비정함이다. 역사라는 이름의 수레바퀴는 두 사람의 문제적 개인들을 이렇게 깔고 지나갔다.
후배 장애인은 가끔 전화해서 왜 아직도 전동휠체어를 사지 않았냐고 채근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수동휠체어가
자전거다. 내 삶의 속도와 맞는다. 내가 제어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의 근육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나의 속도로 컨트롤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동이 빨라야 한다든가 이동이 없어야 된다는 도그마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독서 Guide
1.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을까?
2. 내가 애정 하는 이동수단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 이유는?
3. 오늘 기억에 남는 일을 생각해보자.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일까?
책정보
하얼빈
저자김훈
출판사문학동네
발행일2022.08.03
ISBN9788954699914
KDC813.62
서평자정보
고정욱 ㅣ 동화작가·문학박사
장애를 아동문학에 투영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등을 포함, 총 340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특히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과거 MBC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이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