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은 어느 빈곤층 가족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인생의 궤도를 바꾸려다가 파국에 이르는 이야기다. 그들이 살고 있는 반지하 공간은 행인이 창문에 대고 소변을 볼 만큼 철저하게 격리되고 소외되어 있다. 그런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인해 가난이 더욱 비참해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에 짓눌리지 않고 탈출구를 모색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선 아들과 딸의 문화 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부잣집 고등학생의 공부를 지도하고 그 어머니 앞에서 유아 교육 전문가의 코스프레를 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박사장 집에 ‘기생’하는 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은 가족 구성원 사이의 든든한 결속이다. 치밀하게 짜인 각본을 차근차근 실현해 가는 협업 감각이 놀라운데, 탁월한 소통력과 두터운 신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가족은 대다수 빈곤층과 사뭇 다르다. 그들만큼 자존감이 높고 배짱이 두둑하며 가족 관계가 돈독한 경우는 실제로 매우 드문 것이다. 고도 성장기에는 많은 사람이 가난했지만 상승 이동의 통로가 넓었고 서로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가족 및 친지 그리고 지역사회의 유대가 탄탄한 편이었다. 그런데 IMF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경제가 지속되고 뉴타운의 확장 속에 기존의 달동네가 해체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음습한 반지하처럼 암울하고, 그 절망감과 두려움은 고립되고 단절된 관계 속에서 더욱 악화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사회적 자아도 극도로 위축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빈곤을 가리켜 ‘수치심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아이들의 성장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그 점에 착안하여 빈곤 청소년들의 생활과 내면을 비춰보고 있다. 저자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지내다가 가난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새롭게 공부했다. 이 책은 학위 논문을 재구성하여 펴낸 것인데, 8명의 청년이 청소년기부터 밟아온 10년간의 인생 여정을 세밀하게 증언해준다. 사회적으로 점점 비가시화되는 존재, 어수선해지는 세상에서 묵음 처리되어버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뜻깊은 저작물이다.
가난이란 경제적 결핍만이 아니기에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장마다 한 명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정해서 그들의 성장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그에 관한 저자의 분석과 생각을 ‘뒷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덧붙인다. 책에서 만나고 있는 청년들은 대개 조부모 세대부터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 살아가면서 좌절감과 무기력에 휩싸여 있다. 빈곤은 단지 저소득에 그치지 않고 시간 빈곤, 문화 빈곤, 주거 빈곤 등 복합적인 불평등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사회적 존재가 일상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계층의 장벽을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자괴감에 빠진다.
가족 관계는 가난과 맞물려 삶을 더욱 황폐하게 한다. 부모가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자녀에 대한 정서적 학대로 드러내거나, 알바하면서 힘들게 번 돈을 부모가 계속 빼앗는 등, 성장의 ‘힘’이 되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짐’이 되어버린다. 본인이 열심히 공부하여 학력을 높이더라도 그렇듯 취약한 가족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건강한 어른으로 자립해 가기가 어렵다. 유년기의 애착 결핍으로 인해 사회적 자아가 건강하게 형성되지 못해 엉뚱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고 정서적으로 착취당하기도 한다. 8장에 나오는 혜주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정환경이 불리하다면 다른 공간이나 관계에서 건강한 자아를 만날 수 있어야 하고, 학교가 그런 장(場) 가운데 하나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빈곤 청소년들이 많이 진학하는 특성화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마음을 돌보고 잠재력을 북돋아 주는가. 저자가 지적하듯이 현재의 교육제도는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인권, 자아실현, 교육받을 권리보다는 경쟁을 통한 선별 기능을 주로 수행한다. 그런 가운데 특성화 고등학교는 구체적인 진로 탐색과 준비를 도모하는 대신 대학 갈 아이들을 위해 ‘양아치’를 한 번 걸러내는 역할로 기능한다.
의연하게 길찾기를 해나갈 수 있도록
다행스럽게도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생애를 꾸준하게 개척하는 아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3장에 나오는 지현은 지역아동센터나 복지기관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공부를 해나가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왔다. 거기에는 숱한 난관을 웃음으로 극복해온 어머니의 긍정 에너지가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아울러 현실을 비관만 하지 않는 마음가짐도 빈곤을 극복해낸 중요한 비결로 분석된다. 가난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일 뿐, 자기의 잘못도 죄도 아니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지현은 생각한다. 자신과 가난한 상황을 분리해서 자존감을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파악하면서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바로 그러한 태도가 가난을 극복한 청소년들의 공통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생존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나를 성찰하면서 자신만의 단단한 핵심을 빚어가는 것이다. 그렇듯 자아 정체감을 안정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아이들은 진로 탐색에도 유능하다. 그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진로 선택의 고민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과 추구하는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펴나간다. 그것이 이뤄지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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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향해 관심이 집중되면 이전의 부정적인 생각이나 관계는 자연스럽게 단절이 되었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노력이 쏟아졌다. … 나는 빈곤가정 청소년들의 자아정체감은 진로 탐색을 통해 형성해야 하고, 진로 탐색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할수록 성찰하는 힘을 역동적으로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학교생활을 포함해서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많이 할수록, 부모, 특히 아버지와 개방적인 대화를 많이 할수록, 부모, 교사, 친구 등의 사회적 지지와 교육적 관여가 많을수록, 청소년 자신이 진로에 관한 자율적 결정을 많이 할수록 진로 효능감과 결정 수준은 높아진다.
- 269~271면
인간의 삶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은 삭막한 환경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을 발현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동체적 지지가 있어야 한다. 빈곤 청소년들이 지닌 가정의 취약함을 여러 가지 제도와 사회적 도움으로 보완해야 한다. 사회학자 바우만은 이렇게 말했다 : “가난의 의미는 ‘곁’에 있는 ‘우리’가 어떤 이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불평등이 점점 심화하는 지금 우리는 어떤 존재로 그들 곁에 있어야 하는가. 빈곤 청(소)년들이 인생의 장기적 전망을 세울 수 있는 시야와 기력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독서 Guide
1. 오래전 도시 곳곳에 있었던 달동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살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자라나는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이웃은 어떤 존재였을까?
2. 책에서 소개된 8명의 청소년은 모두 열악한 생활 여건에서 살아왔지만, 현실에 대응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3. 위기 청소년은 미디어에서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는가?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와 표현을 뽑아보자. 그리고 그러한 담론이 초래하는 사회적 효과는 무엇인가?
책정보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저자강지나
출판사돌베개
발행일2023.11.06.
ISBN9791192836355
KDC338.5
서평자정보
김찬호 ㅣ 성공회대 겸임교수
사회현상과 마음의 움직임을 인문학적으로 풀이하면서 더 나은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여러
대중강좌를 통해 시민과 함께 배우는 사회학자. 『생애의 발견』, 『모멸감』, 『유머니즘』등 십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