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북 요약
1. 소수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는 기회를 갖는다.
2. 누구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깊이는 같다.
3. 다이크 같은 공동체의 기능은 높게 평가하여 결코 모자라지 않다.
소수자의 삶 속으로
요즘 지체장애인에 대한 성적 폭행, 근친의 강간 같은 사건을 들으며 아연한 경우가 잦다. 일단 납득이 안 간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감춰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 그럴까? 그렇지 않다. 유교적 윤리가 훨씬 강하였던 왕조의 역사서에도 비슷한 사건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고, 늘 일어났으나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와중에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이 손에 잡혔다. 저자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 같은 여자’ 그런데 그는 ‘젠더퀴어’이다. 퀴어는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 준 생물학적 성(性)과 자기 정체성으로서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1963년 미국 오리건주 시골의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 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퀴어에다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이었다. 그런데 보호는커녕 어린 시기부터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성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당했다. 이른바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도시로 나와, 다이크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였고, 이후 퀴어, 장애, 노동, 환경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그의 삶을 고백하는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은유로서의 산
클레어가 말하는 은유로서의 산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의 고된 일상 속에서 뼈가 으스러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버둥거리며 힘겹게 산에 오르고, 그 산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거기서 실패를 겪고, 그 그림자에 묻혀 살아왔을까?(41면) 이때 은유로서의 산은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먼저, 산이 갖는 높이와 모양의 특성상 계급 피라미드가 떠오르고, 그다음엔 산꼭대기를 뜻하는 정상(頂上)이라는 단어가 갖는 동음이의어로서의 정상(正常, normality)이 떠오른다.
일라이 클레어는 ‘뼈가 으스러진’ 그래서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산은 슈퍼장애인의 이미지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슈퍼장애인이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한 혹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장애인(정상인)보다 우월한 혹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회적 성취와 인정, 귀함과 명예를 얻은 사람, 우린 이렇게 돋보이는 사람이 부럽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린다. “너희들은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하고 추하기 때문에 거기 아래 바닥에 살고 있다.”라고, “누구든지 능력만 있다면,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사다리 위로 오를 수 있다.”라고.
누구나 산의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는 쉽게 그곳에 오르지만, 누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오를 수 없다. 설령, 만에 하나 그곳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라고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슈퍼장애인이 결코 장애인의 표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슈퍼장애인 서사는 비장애인의 우월감을 부각하고 장애는 성취와 모순된다는 믿음을, 장애는 무능과 짝이라는 믿음을 유포한다. 이것은 장애인에게 무척 불리하다.
집으로서의 몸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다양한 소수자 운동이 선명한 노선과 치열한 투쟁으로 우리 사회를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모시켜 왔다. 그러나 일라이 클레어는 그런 선명성과 단일쟁점 운동이 가져온 문제와 한계를 지적한다. 예컨대, 도시에 거주하는 중산층 환경운동가가 환경 파괴에 대해 논하면서 벌목 노동자를 비난하고 배척한다. 벌목 노동자를 ‘무식한 짐승(레드넥)’ 혹은 ‘산림파괴의 공범’이라고 묘사하면 활동가와 벌목 노동자는 대립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환경운동가에게 벌목 노동자와 연대할 것을 제안한다.
벌목 노동자 역시 자본주의의 착취 대상이며, 산림파괴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생계에 위협을 받는 피해자다. 환경을 파괴해 막대한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연 파괴에 누가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가? 종이가 나무로부터 온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무분별한 자원개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무구한가? 환경을 지키고 벌목 노동자도 살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착취의 구조를 끝내기 위해 피상적인 해결책을 버리고 복잡함(트러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런 주장은 그가 지닌 다수적 소수자성으로 인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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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있는 나의 몸 … 내 몸은 침해당했다 … 나의 백인 몸 … 나의 퀴어 몸 …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이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수많은 다른 몸들이 내 몸을 따라다니고 내 몸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 이해될 때만 몸은 집일 수 있다 … 백인, 시골, 노동계급 가치관을 가진 몸
- 55~57면
‘집으로서의 몸’이 의미하는 것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이다. 몸으로서의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은 꽤 복합적이다. 예컨대 장애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가령, 장애의 종류에 따라, 장애 정도에 따라, 또 그가 가진 재산 정도에 따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 몸이 가진 각자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경험하는 차별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린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장애인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일반화하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심장 속의 돌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들로부터 돌을 맞고 원숭이, 지진아라 불릴 때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로부터 고문과도 같은 학대를 당할 때마다, 일라이 클레어는 몸의 감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버렸다고 했다. 그 정도로 그를 향한 외부의 폭력은 견디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그는 부서진 몸을 안고 숲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은둔자로 살고자 했다. 자기에게 가장 한결같고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심장 속에 달그락거리는 돌’(265면)을 안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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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수많은 이유로 나를 강간했다. 그리고 그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나는 여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의 이 특정한 몸으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런 훈육은 더 큰 권력구조와 위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 260면
그랬던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생긴다. 도시로의 망명 그리고 다이크와의 만남이었다. 진보적인 도시의 퀴어 공동체에서 그는 안전함과 행복을 느꼈다. 그곳에서 자신의 다이크 정체성을 찾고, 은둔자로 살고 싶었던 마음을 버렸다. 불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뇌병변과 힘센 육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활동을 통해 과거 자신이 겪은 성적 학대와 폭력을 더 큰 맥락에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몸속 깊이 새겨져 집요하게도 사라지지 않을 공포, 상처, 수치심의 기억을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한다.
독서 Guide
1. 소수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듣고 경험한 기회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2. 장애인에 대한 태도에서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3. 저자의 인생관이 잘 드러난 대목을 지적하고 그 까닭을 말해 보자.
책정보
망명과 자긍심
저자일라이 클레어
출판사현실문화
발행일2023.07.18.
ISBN9788965642497
KDC306.768
서평자정보
고운기 ㅣ 시인·한양대 교수
‘삼국유사’와 관련된 고전문학의 다양한 면면을 연구하면서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 30여 권의 저서와, 시집으로 『구름의 이동속도』
등 1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