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1 요약
1.‘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
2.2023년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 도서
3.인간 오펜하이머의 자기모순적인 성격을 파헤치는 책
프로메테우스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카프카스 산 바위에 결박되어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신의 비밀을 알려줌으로써 문명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로부터는 영웅 대접을 받지만, 신들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추방당한다.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맞서는
인물, 숱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타르타로스로 추락하는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프로메테우스와 함께 떠오르는 문학 작품이 또 하나 있다. 1818년에 간행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그러니까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이다. 이 소설에서 ‘괴물’을 만든 과학자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고
그가 곧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얘기다.
고대의 프로메테우스와 19세기 메리 셸리가 창조한 프로메테우스에 이어 20세기에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한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사람,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이다. 이 책 저자인 역사학자 마틴 셔윈과 저널리스트 카이 버드는 과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삶의 모습을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치밀하게 그려낸다. 가족들, 연인들, 동료들 그리고 적들이 오펜하이머의 모순적인 삶에 깊이를 더한다.
20세기 전반 세계 물리학계의 동향 및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관계, 바가바드기타와 오펜하이머의 사상, 2차 대전 당시 원폭 투하를 둘러싼 비화, 1950년대 미국을 강타한 매카시즘과 학문의 자유 등등도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 오펜하이머의 삶의 역정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문학 편력과 지식인으로서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책임감의 수준이다. 앞엣것은 그의 인문적 감수성과 관련이 있고, 뒤엣것은 지식인의 욕망과 윤리 또는
책임 문제로 이어진다.
프루스트를 읽는 과학자
1967년 2월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릴리엔털은 그를 “시와 과학을 하나로 묶은 천재”(889면)였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오펜하이머는 말 그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물리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가벼운 교양
수준을 뛰어넘는 문학 독자이자 아마추어 시인이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열네 살 때 이미 조지 엘리엇의 대작 《미들마치》에 푹 빠져들었고, 비슷한 시기 호메로스를 그리스어로, 호라티우스를 라틴어로 읽었다. 여기에
셰익스피어,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마르셀 프루스트, 횔덜린, 스콧 피츠제럴드, 스테판 츠바이크, 헨리 제임스,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W. B. 예이츠, T. S. 엘리엇 등등이 한참
이어진다. 이 가운데 그에게 계시처럼 다가온 책이 있었다.
"
"
그 책은 오펜하이머의 고뇌하는 영혼에 답을 주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오펜하이머가 나중에 버클리 시절의 친구 슈발리에에게 말했듯이,
그가 이 책을 코르시카를 헤매고 다니던 어느 날 밤 손전등 밑에서 읽었던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경험들 중 하나였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자기 성찰에 관한 고전 소설이고, 그것은 오펜하이머에게 깊고 항구적인 인상을 남겼다.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93면
오펜하이머는 독서를 통해서, 특히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정신과 의사의 도움 없이 우울증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일들을 비상하게 잘하지만
그래도 한줄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90-91면)이라고 한 것도 그의 폭넓은 독서 체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인문적 감수성은 20년 동안 소장으로 재임한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실현된다. 오펜하이머는 고고학자 호모 톰슨, 시인 엘리엇, 역사가 토인비, 사회철학자 이사야 벌린 등 내로라하는 인문학자들을 고등연구소로 초대한다.
그는 이곳을 ‘지식인을 위한 호텔’로 만들고 싶어 했던 듯하다. 이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던 오펜하이머는 고등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 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571면)
문제는 정치다?!
과학자이면서 문학청년(?)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36년 진 태트록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오펜하이머의 연인이었던 진 태트록은 공산주의자였다. 독일어판 《자본》을 읽는가 하면,
그녀의 안내로 하콘 슈발리에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만났고, 한때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지만, 훗날 몇몇 FBI 정보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원이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
"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 245면
하지만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에 휘몰아친 ‘반공 히스테리’ 또는 매카시 광풍은 오펜하이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 후보자로 거론되던 1942년 9월 이후 그는 당국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공산당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비밀 공유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수소 폭탄 제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1954년 열린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 보안 청문회에 회부된 오펜하이머는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당한다. 현대과학의
영웅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당하고 만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패배는 또한 미국 진보주의의 패배였다.”(830면)
원자 폭탄 개발을 단순히 “나치스에 맞서고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위대한 노력의 일환”(329면)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추방한 것은 미국 지성계로서는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 총지휘자로 추천한 그로브스 제독의 행보도
정치적인 행위였듯이, 후버 국장이 지휘하는 FBI가 연봉보다 많은 돈을 들여 그를 감시하고 도청한 것도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굳이 원자 폭탄을
투하한 것도 정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정부 관료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다. 결국은 정치가 문제였던 것이다.
전갈들의 싸움, 인류의 미래
2차 대전을 끝내는 데 원자 폭탄 투하가 필수적이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세계사에 격변을 몰고 올 사건이었다는 것을 오펜하이머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듯하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지 사흘 만에 오펜하이머는 전쟁부 장관 스팀슨과 대통령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한다.
"
"
우리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핵무기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세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설령 주도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가장 끔찍한
파괴력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우리는 과학적, 기술적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적국에 피해를 가할 수는 있어도 이 나라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안전은 오직 앞으로 전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 485면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사람으로서 나서서 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발언 또는 자기모순적인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연구와 행위가
초래할 파국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를 막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다. 핵과 관련된 비밀의 공유, 핵 확산 금지, 수소 폭탄 개발 반대 등등이 그 예이다. 과학자이자 과학 행정가
나아가 과학 정치가였던 오펜하이머의 욕망과 윤리는 그의 내면에서 이처럼 예리하게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20년이 지난 1965년 미국의 NBC는 〈원자폭탄 사용 결정〉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깊은 회한에 젖은 듯한 표정의 오펜하이머는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다.”―을 낭송한다(877면). 그의 말대로 원자 폭탄 개발 이후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핵무기가 지구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데도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다. 우리 시대의 프로메테우스, “시인처럼 글을 쓰고 선지자처럼 말하는 과학자” (870면) 오펜하이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하다.
"
"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
- 701-702면
독서 Guide
1.영화 〈오펜하이머〉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비교해 보자.
2.원자 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가 핵 확산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3.과학자는 정치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른 학문은 어떨까.
책정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 평전
저자카이 버드
출판사사이언스북스
발행일2023.06.12
ISBN9791192908236
KDC420.099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