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1 요약
1. 실질적인 일거리가 없는 일자리가 늘어나는 세상
2. 근무시간과 생산력 사이의 잘못된 관계 설정
3. 가짜 노동에 맞서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천 전략
노동시간이 줄어들기는커녕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0대 초에 히트를 쳤던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광고 문구다. 과중한 업무에 녹초가 되었던 샐러리맨이 자동차를 타고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며 환한 미소를 짓는 영상이
함께 흘렀다. 많은 직장인이 이른바 월요병에 시달리고(서울아산병원의 통계에 따르면 40대의 심장병 돌연사가 월요일 오전에 가장 많다고 한다. 다른 선진국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주말이나 휴가를 간절히
기다린다. 우리는 왜 이토록 일을 많이 하는 것일까?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어 수많은 기술이 등장하면서 노동의 효율은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자와 서비스가 한정된 것이라면, 기계가 사람의 몫을 대신하는 만큼 노동시간은 줄어들어야 마땅하다.
실제로 마르크스나 케인스는 머지않아 노동자들이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산업화를 지나 정보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훨씬 혁신적인 기술들이 도입되었는데도,
근무시간은 오히려 늘어났다. 우리는 왜 그렇게 늘 바쁜 것일까?
《가짜 노동》은 그 질문을 가지고 여러 직업 현장을 탐방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수집하여 정리한 책이다. 핵심 메시지는 제목에 잘 압축되어 있다. 지금 직장인들이 너무 많은 업무에 짓눌리는 이유는
쓸데없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의 쓸모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여러 기준을 잡을 수도 있지만 간단치 않은 작업이다. 그 대신 일하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평가를 들으면 비교적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다.
201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12,000명에게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절반이 자신의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고 했다. 공허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삶에 존엄성을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무직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가짜 노동은 어떤 것인가. 산업화 이후에 육체노동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그에 비례해서 사무노동이 계속 늘어났다. 20세기에 테일러리즘이 확대됨에 따라 생산과정을 정교하게 시스템화하면서 노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관리직의 수가 증가했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여러 직종이 탄생했다. 그리고 시장 상황이 복잡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업무가 계속 등장했다. 인사, 홍보, 현황 조사, 마케팅, 연구 개발, 품질 확인, 디자인과 브랜딩, 경영전략,
감사, 준법 감시, 컨설팅, 인맥 관리, 고객 지원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이 가짜 노동은 아니다. 다만 정체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 기사, 어부, 청소부, 배달노동자, 간호사 등이 파업을 하면 막대한 혼란이 발생한다. 반면에 사무직은 업무가 중단된다 해도
별다른 지장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육체노동과 달리 사무노동은 어떤 절차로 구성되고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일하는 척하기’가 쉽다. 그래서 육체노동을 풍자하거나 비꼰 문학작품은 없지만,
사무직은 종종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업무의 부조리함에 대해 주인공이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필경사 바틀비〉가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가짜 노동을 줄이거나 없애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일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두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수치심, 자기혐오, 고립감은
크다. 또 다른 이유로, 조직의 관성을 들 수 있다. 직원이 필요 없어지면 부서의 규모가 축소되니까 관리자들은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업무를 부풀리면서 인력을 확보하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 풍토 속에서 할 일이 없다는 말은 심각한 금기어가 되고,
부하 직원의 일을 찾아주지 못하는 상사는 무능하다고 여겨진다.
직장 업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회의도 가짜 노동의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다. 허술한 준비, 어설픈 진행, 부적절한 안건 등으로 인해 직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직원들은 회의 시간을 합법적으로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로 여기기까지 한다. 이처럼 많은 근로자가 실질적인 일에서 멀어지는데도 노동의 속도 늦추려 하지 않는다. 분주함이 능력의 징표로 여겨지는 문화적 요인도 있고, 달갑지 않은 일이 부여될 경우를 대비해서 끊임없이 바쁜 척을 하는 습성 탓도 있다.
그리고 뭔가를 한다는 이유로 월급을 받다 보니, 그 뭔가가 가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삶이 더욱 권태로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여가 시간이 늘어나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은 가짜 노동에 맞서는 시민 불복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쓸모없는 일거리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그 일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직장 생활의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을
내놓는다. 할 일을 끝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하자. 실질적인 일에 힘을 쓰자, 회의 시간을 대폭 줄이자(그렇게 했더니 생산성이 급증한 사례가 많다), 유능한 직원을 관리직으로 승진시키지 말고 자율성을 부여하자…. 그렇게 해서 확보된 시간은 각자의 잠재력을 찾아내고
보다 풍요로운 삶을 가꾸는 일에 할애될 수 있다.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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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더 발전하고 발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짜 노동에 의한 시간 낭비를 멈추고 러셀의 권유에 따라 놀이와 여가를 위한 시간을 허락하며 표면적 사고보다는 깊은 사고를 촉진해야 할 것이다. 폭발하는 인구 증가와 임박한 기후 재난을 볼 때 인류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이런 문제에 대해 그저 연례 보고서나 더 써내기보다는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짜노동으로부터 시간을 해방시켜 자기 개발에 쏟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생각하고 놀고 시험해 볼 공간과 자유를 주어야 한다. … 가짜 노동이 남기는 불가피한 공허를 채울 정치적 사회적
수단을 찾아보자. 1932년 케인스의 표현대로 ‘삶의 기술’을 다시 배울 여유 공간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 378-379면
현대사회는 소비할 수 있는 문화 상품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스스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은 전통사회보다 훨씬 떨어진다. 참다운 문화는 자신의 일상에 충실할 때 꽃피울 수 있는데, 가짜 노동은 거짓 자아를 강화한다. 이제 문명의 편의에 기대어 자유시간을 확대하고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일들을 다양하게 창출해야 한다. 경영자나 노동조합도 노동시간을 임금의 기준으로 삼는 틀에서 벗어나 노동자가 자신의 시간에 통제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서 주어지는 정신적 잉여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빚어낼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전환의 논거를 찾고
전략을 탐색하는 데 소중한 지침이 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화제작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과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독서 Guide
1.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각자의 직장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자.
2. 회의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리고 회의 시간을 줄이면 왜 일의 효율이 올라가는 것일까?
3.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워라밸’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어떤 사회적 조건이 필요한가? 그리고 근로자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이 요구되는가?
책정보
가짜 노동
저자데니스 뇌르마르크
출판사자음과모음
발행일2022.08.08
ISBN9788954448413
KDC321.5
서평자정보
김찬호 ㅣ 성공회대 겸임교수
사회현상과 마음의 움직임을 인문학적으로 풀이하면서 더 나은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여러
대중강좌를 통해 시민과 함께 배우는 사회학자. 『생애의 발견』, 『모멸감』, 『유머니즘』등 십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