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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싸우는 파가 내 파요”

― 방현석 지음, 《범도》

작성일: 2023.11.16

히든북 요약

1.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삶을 그린 방현석의 장편소설

2.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반도의 시공간을 아우르는 장대한 서사

3.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의 삶과 행동을 일인칭(홍범도) 시점으로 형상화

직업은 의병, 희망은 고려 독립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홍범도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에 입국하면서 한 장의 서류를 작성한다. 친필로 쓴 이 ‘조사표’에 따르면, 홍범도는 의병대의 위임장을 갖고 있었고, 1921년 1월 18일 국경을 넘었다. 그의 직업은 의병이었고, 입국 목적과 희망은 고려 독립이었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한 후 포수가 되고, 군문(軍門)을 거쳐 의병의 길로 들어선다.

의병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자신의 희망을 고려 독립이라고 말하는 사람 홍범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죽음의 열차를 타야 했던 사람, 고려극장에서 수위 노릇을 하다 이 자리마저 잃은 뒤 정미공장에서 품팔이했던 사람 홍범도. 그 홍범도가 소설로 부활했다. 그것도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홍범도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절묘한’ 시점에 말이다. 작가 방현석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자료조사와 현지답사를 했고, 꼬박 3년 동안 집필에 몰두했다. 그러니 작가는 홍범도가 자랑스럽게 돌아올 것도, 이처럼 무참하게 모욕당할 줄도 몰랐을 것이다.

이를 두고 ‘운명’이라 해야 할까. 1권과 2권을 합쳐 1300쪽에 달하는 이 소설을 대하는 심정이 착잡하고 뒤숭숭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양반과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그가, 일본제국주의의 강도 행위에 맞서 주권을 되찾아 당당한 자주독립의 나라에서 살고 싶어 했던 그가,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모욕의 늪으로 빠져드는 이 상황에서 《범도》를 읽다니, 이래저래 착잡한 생각이 오가지 않을 수 없다.



‘범도’의 발길을 따라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18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주요 역사적 배경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전쟁,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 해산, 1910년 강제 합병, 1919년 3・1운동,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 등이다. 그 거센 소용돌이에 총 한 자루를 들고 헤쳐 나가는 홍범도가 있고, 홍범도와 함께한 많은 동지가 있다. 홍범도가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은 그를 영웅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소설의 제목을 ‘홍범도(洪範圖)’가 아니라 ‘범도’라고 한 것도,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 시점을 택한 것도, 자칫 영웅서사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서 나는 ‘범도’를 홍범도를 가리키는 ‘範圖’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凡徒’로 읽고 싶다. 이렇게 읽을 경우 홍범도도 ‘凡徒’ 중 한 명일 수밖에 없다.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양반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역시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인 홍범도와 함께 견디며 싸우고 싸우며 견디는 드라마가 캄캄한 한반도 근대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난히 내 눈길을 끈 것은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를 아우르는 광대한 공간의 스펙터클이다. 아득령에서 시작해 평양, 한양, 울산, 언진산맥의 총령, 진남포, 금강산, 단발령, 신계사, 영원, 청진, 회령, 봉오동과 청산리를 비롯한 만주 곳곳과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범도’의 발길이 닿는 곳은 한국 근대사 저항의 불길이 어디까지 닿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반도 북쪽의 우람한 산들과 산림을 묘사한 지점에서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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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을 잇는 아득령에서 굽어본 세상은 아득하고 아득했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자강고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더 광활한 개마고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아득령에서 서쪽으로 아득히 흘러 내려간 남천은 강계를 거쳐 독로강에 합류하여 까마득히 서해로 향했으며, 동쪽으로 아득히 흘러 내려간 오만동강은 동문거리를 거쳐 장진강에 합류하여 까마득히 동해로 향했다.
 

-1권 31면

아득하고 까마득한 산맥과 산과 강. 작가가 공들여 그리고 있는, 한반도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의 장관을 상상하노라면 상실감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떨치기 어렵다. 남북 관계가 해빙 분위기였을 때만 해도 북쪽의 광막한 풍경을 상상하는 것이 지금처럼 안타깝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저 우람한 산맥과 산들, 울창한 수해(樹海)를 헤치고 흐르는 강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끈을 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 기대가 현실화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압도적인 탓인지 한반도 북쪽, 특히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의 자연을 묘사한 장면들은 점점 낯설어지는 이름과 함께 아쉬움과 그리움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울 따름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범도’의 발길과 눈길을 따라가며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진실

《범도》의 등장인물들은 화자인 ‘나’(홍범도)의 시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을 택할 경우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물 묘사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나’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기술하면 독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이와 함께 작가의 메시지도 비교적 쉽게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이 소설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절제된 언어와 감정 표현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이는 ‘나’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독자의 믿음을 얻기 위한 소설적 전략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범도》는 장대하면서도 간결하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장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시점을 벗어나지 않는 서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결하다.

실존 인물부터 가상 인물까지 《범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림잡아 오십 명이 넘는다. 등장인물의 수에 비해 인물들의 관계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편이다. 홍범도를 비롯해 안중근, 이인영, 유인석, 리범진, 리범윤, 최재형, 최진동과 최운산 형제, 김성녀, 지청천, 박서양, 홍양순, 김알렉산드라, 엄인섭 등 실존 인물의 형상은 그들의 전기적 사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여기에 가상 인물이 더해진다. 신포수, 백무현, 백무아, 남창일, 차이경, 수경, 수이, 금희네, 금희, 김수협, 진포, 현창하, 이정재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단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유기적으로 엮어 소설적 진실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 상인 조직 두목에게 겁탈당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해군성 정보국 요원이 되어 돌아온 백무아는 홍범도의 연인이자 동지로서 서사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가상 인물이며, “고급 친일파의 집결지”이자 “일본의 간첩 조직”인 현양사(玄洋社)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 엄인섭은 배신자이자 밀정으로서 홍범도를 고통의 심연으로 이끄는 실존 인물이다. 연인 백무아와 밀정 엄인섭 사이에 많은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누가 가상 인물이고 누가 실존 인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처럼 인물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역사는 소설이 되고, 객관성을 내세우는 역사적 사실은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소설적 진실로 나아간다.



누가 이 사람(들)을!

홍범도가 의병에 합류한 아들을 전투에서 잃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소설 《범도》에서는 어떨까. 아들을 묻고 돌아온 저녁 홍범도는 전투일지 하단에 한 줄을 따로 적는다.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오월 십팔일 열두시였다.” (2권 132면) 담담하기 짝이 없는 이 한 줄에 담긴 아픔과 슬픔의 깊이를 헤아리려 애쓰는 만큼 우리는 소설적 진실의 핵심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동지와 아내를 적들에게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지의 배신에 비애를 온몸으로 맛보면서 이 사람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싸워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홍범도는 고려령 1고지를 떠나면서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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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가 의병이 되어 목숨을 내걸고 싸운 것은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서는 아니었소. 이기고 지고를 떠나 오직 의로써 싸워왔소. [……] 그들이 싸워왔기에 오늘의 싸움이 있소. 오늘 싸워야 내일의 싸움도 있소. 이번에 싸우지 않으면 다음 싸움도 없소.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언젠가, 대한의 누군가가 못다 한 우리의 이 싸움을 이어갈 것이오. 그렇지 않소?”
 

- 2권 549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의로움을 위해 몸과 마음을 던져 싸운 사람들 앞에 최소한의 예라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녕 부질없는 혼잣말에 그치고 말 것인가.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것일진대, 나라는 나라를 지키려 목숨을 바치는 의병을 ‘비적’으로 규정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토벌하지 않았던가. 홍범도가 레닌의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 문제라고? 홍범도의 말을 들어보라; “난 흰파든 붉은파든 검은파든 상관없소. 일본과 싸우는 파가 내 파요.”(2권 376면)

독서 Guide

1.제목을 ‘홍범도’가 아니라 ‘범도’라 한 것은 왜일까?

2.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한 이유는 무엇일까.

3.역사와 소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책정보

범도

저자방현석

출판사문학동네

발행일2023.06.07

ISBN9788954693271

KDC813.62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