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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무늬, 얼룩, 흉터

- 팀 마샬, 《지리의 힘》

작성일: 2022.09.22

PICK1 요약

1. 지구 곳곳의 ‘땅의 무늬’가 품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

2. 제국주의 시대 제멋대로 놓인 선은 지문에 대한 무지와 폭력과 오남용의 상징

3. 장소를 찾는 여행자에게 폭넓은 역사적·정치적·문화적 시야를 제공할 책

지리학, 땅의 무늬를 살피다

지리학을 지문학(地文學)이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일본을 경유해 서구의 학문을 왕성하게 받아들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연지리학과 지질학을 아울러 지문학이라 했다. 하늘의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을 천문학이라 하듯이 자연이 땅에 새겨놓은 다양한 무늬를 연구하는 학문을 지문학이라 했던 것이다. 하늘과 땅의 신비한 결합으로 생겨난 인간의 무늬를 탐사하는 학문을 일컬어 인문학이라 하거니와, 천문학과 지문학과 인문학은 모두 시간이 새겨놓은 다채롭고 신비한 무늬(文=紋)를 살피는 공부인 셈이다.

25년 이상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팀 마샬의 《지리의 힘》은 지구 곳곳의 ‘땅의 무늬’가 품고 있는 사연을 들려준다. 인간에 의한 지구 개발(약탈!)이 본격화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땅에 무늬를 새긴 것은 지질학적 운동을 비롯한 자연이었다. 기나긴 시간이 지진과 홍수와 폭풍을 도구 삼아 산과 강과 평야와 사막을 만들었고, 그곳에 적응하면서 인간은 고유한 삶의 문양을 짜왔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한 이래 오랜 세월 거의 변함이 없었던 땅은 급속도로 본래의 무늬를 잃어버린다. 얼룩이 번지고 흉터가 자리 잡는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의 동역학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중국, 미국, 서유럽, 러시아에서 시작해 한국과 일본,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인도, 북극으로 이어지는 10개 권역의 현대적 지리=지문을 탐사하는 이 책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용어는 분쟁, 패권, 분열, 긴장, 복수, 공략, 군사적 개입, 대살육전, 각축 등 부정적인 것 일색이다. 목차만 보아도 자본주의적 세계 지배,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얼마나 잔혹하게 다양한 무늬를 악용하고 또 초토화했는지 알 수 있다. 예컨대 이러하다. ‘한국,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강대국들의 경유지가 되다’, ‘라틴 아메리카, 내륙이 텅 빈, 거대한 지리의 감옥에 갇히다’, ‘중동, 인위적인 국경선이 분쟁의 씨앗이 되다’, ‘파키스탄, 말썽 많은 아프간과의 국경을 물려받다’.



땅을 해치면 인간의 삶이 망가진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이전만 하더라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불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집단들 사이에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큰 틀에서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땅을 해치면 결국 인간의 삶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제국주의적 욕망이 이 대륙들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프리카 대륙의 경우 거대한 만큼이나 지역적 특성과 기후, 문화가 다양하다. 하지만 “런던, 파리, 브뤼셀, 리스본 같은 대제국의 수도로 돌아온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대략적인 등고선이 그려진 지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 제멋대로 선(국경선)들을 그려 넣었다.”(228쪽) 유럽의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남긴 많은 식민 유산의 잔재 중 하나인 이러한 선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만이 아니다. 중동 지역의 국경선은 어떠한가. 멀리 갈 필요 없이 한반도에 그어진 삼팔선은 어떠한가. 차별과 단절을 정당화하는 선,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선, 자연과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되는 선, 이 선이야말로 지리=지문에 대한 무지와 폭력과 오남용의 상징이다.



‘장소’로 다가온 ‘공간’

세계 곳곳을 직접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들, 책이나 영상을 통해 멀고 가까운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면 특정 지점에 깃든 무늬가 간직한 아름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라야 그곳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내 삶의 무늬를 구성하는 ‘장소’로 다가올 테니까.

다양한 지리적 조건 아래에서 특히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욕망이 낳은 결과들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이 책은 ‘장소’를 찾는 여행자에게 폭넓은 역사적·정치적·문화적 시야를 제공할 것이다. (다른 지리적 권역의 이야기는 이 책의 속편 《지리적 힘 2》에서 들을 수 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손길에 황폐해지고 피폐해진 하늘의 무늬와 땅의 무늬 그리고 인간의 무늬. 무늬를 대신하는 흉물스런 얼룩과 참담한 모양의 흉터. ‘창백한 푸른 별’(칼 세이건)은 언제까지 우리를 두고만 보고 있을까. 지리=지문의 힘을 선용할 길은 정말 없는가. 눈길이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난 후, 피할 수 없는 물음이 긴 여운처럼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책정보

지리의 힘 표지이미지

지리의 힘

저자팀 마샬

출판사사이

발행일2016.08.10

ISBN9788993178692

KDC340.98

서평자정보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정선태 ㅣ  국민대 교수 이미지

대학에서 한국 현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 작품을 길잡이 삼아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전하는 일이 취미이자 직업이다.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등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간행했다.